이번 주 수업 때는 니체씨가 등장했습니다. 프린트물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 쎄군요 0-0
기독교 도덕을 좀 더 일찍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야말로 인류 양심의 불결성,
기독교에 대한 맹목적 신앙은 인생에 대해서는 범죄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본성을 경멸케하고, 반자연이 곧 최고의 도덕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무엇이 신을 존재케하는가. 생의 본질인 불완전성 - 불교에서 '苦'라는 것 -을 부정하는 데서 신이 출발한다.
생의 불완전성을 결여로, 부정태로 여기는 자는 그에 대해 결여 없는, 완전한 상태를 원하며 상상합니다.
불완전함이 생이기에 우리가 꿈꾸는 완전함이란 생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는 생 저편에, 즉 초월의 차원에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줄 누군가, 무엇인가를 상상합니다.
신 그리고 낙원 등이 이렇게 탄생하겠지요? 신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채워줄 존재.
생의 불완전함을 못 받아들이는 딱 그만큼 우리는 신에게 기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누가 순종하는가. 생의 본질에 무지한 자, 생의 불완전함을 결여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종교는 이 무지와 두려움을 파고듭니다.
한편 '자유의지'에 관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는 것? 내 의지로 '좋은 것'을 하는 것?
기독교 도덕은 우리가 자유롭게 '좋은 것'을 좇게 합니다. 축적할 것, 억제할 것, 순응할 것 -.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자유란 사실상 초월에 담보잡혀 있습니다.
나를 완전하게 해 줄 대리자 - 신 - 그리고 내 삶의 지속될 혹은 언젠가 찾아올 완전함을 위하여
'자유롭게', '바르게' 살아간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초월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쩌면 참 단순합니다.
생의 본질을 이해할 것. 생이 고라는 것을 괴롭지만 받아들일 것.
낙원을 믿고, 나중의 혹은 불변의 평화를 믿는 것은 그냥 무지일 뿐이다-
어쨌든 저는 이런 내용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밖에도 재미있는 질문들이 많이 나왔었습니다.
특히, '디지털시대에는 무상이 어떻게 경험될까' 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지속하는 우리 일상이 어느 순간 출렁하면서, 지속이 허상임을 알고
어렴풋하게나마 무상을 경험하는 것 같은데
지속이라는 감각도 없는 것만같은 이 '빠른' 시대에서는 무상이 어떤 식으로 경험되는 것일까.
'빛바랠' 정도의 시간감각도 없는 것 같은데, 무상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질까.
디지털시대에 우리들의 감각은 어떤 식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
계속 생각해 보아요-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