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베스트는 <비구니경>이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거에 꽂히는지?^^)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존자 아난을 유혹하려던 비구니에게
존자 아난이 설법하는 내용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어야만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다들 궁금해 했습니다.
열등감을 승화시켜 깨달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는데 이건 좀 아닌듯~~^^
쌤은 이것이 자기 마음에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끊어낼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관(止觀)은 무엇이 발생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본다는 의미고, 거기서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것.
수행자들은 찰나적인 것과 싸워야 한다죠.
미세의식까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미세하게 올라오는 번뇌까지 끊어낼 수 있다고요.
번뇌의 장이
깨달음의 장이 된다는 붓다의 말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독일주경>이 인상적이었어요.
묘하게 감동적이더라구요.
붓다는 선문답처럼 근심스럽냐는 물음에 잃은 게 없다고, 기쁘냐는 물음에 얻은 게 없다고 답합니다.
집을 떠나 온 붓다는 자기가 버린 것들을 잃었다 생각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늘 동시에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근심과 기쁨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다고 좋아할 것도, 근심스럽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라는 것.
기쁨도 근심스러움도 없다는 붓다의 말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튼 구절구절에서 묘한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 옵니다. ^-^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스피노자는 왜 기하학적 방법으로 <에티카>를 썼을까요?
인간의 윤리가 자명한 자연법칙, 자연의 확실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스피노자.
그런 그의 비전에 맞는 글쓰기가 바로 기하학적 방법이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분리된 게 아니라는 거죠~~
아무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모두 고전주의적 질서에 속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자연의 정합적 질서 속에서 인식의 체계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음 주에 읽을 범위
1)<잡아함경> 23, 24권
2)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아카넷) 1, 2부 =>발제 : 태람
3)데카르트, <성찰> 3~6(지난 주에 읽었는데, 확인을 못하고 지나가서)
=>발제: 인석(3), 효진(4), 미영쌤 (5), 현옥쌤(6) 임돠~~!
*간식: 은하쌤~~!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용용!
1) '내용과 형식'이라는 개념을 넘어 '문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했던 거 같은데, '내용과 형식은 분리된 게 아니다'라고 해버리면, 문제가 무화되어 버리지.
2) 그래야 왜 <윤리학>이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쓰여야 했는지가 설명되겠고.
모쪼록, 공부하시는 분들께서 이점 계속 질문으로 품고 가시기를 바랍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