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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으로 시작해 금문고량주로 끝난 ㅡ.ㅡ 횡단철학학교 '비트겐슈타인과 불교'가 끝났다.

끝났다. 한마디를 쓰고나자 이 세미나와 함께해온 올해 가을과 겨울이 잔상처럼 스친다.

 

불교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무엇을 배웠다고 자신있게 말하기가 궁색할만큼 횡단철학학교는 내게 버거운 과제였다.  그러므로 다만, 이들과 더불어 함께했던 근 4개월을 조근조근 되짚어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횡단철학학교를 시작하고자 했을때 나는 좀 의기양양했다. 군대를 다녀왔고, 그래서 마음속을 짓누르던 가장 무거운 돌을 완전히 치웠버렸다. 군대물도 안빠진 상태에서 시작한 EVE는 내 방학을 가득채울만큼 즐거웠고 나름 충실히 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어찌어찌하다 나간 방송사 주관 토론대회는 날 큰무대로 올려놓았고, 난 그상황을 한껏 즐겼다. 무슨일이든 잘 할수 있을것 같았고, 난 언제나 그렇듯이 그 뿌듯한 감정에 쉽게 도취되었다.  아무튼, 이 도취된 자신감은 학교와 병행할것이 험난할줄을 알면서도 세미나를 두개 '지르는' 모험을 가능케했다. 평상심의 나였다면 당연히 이리저리 재보다 내 역량이라고 생각되는 범위에서 선을 그어놓았을거다. 너무 익숙한 종류의 그런 선,택 그런 삶. 실패없고, 무리도 없고, 괜찮은 평판과 무난한 자기만족으로 채워지는 예상된 행보. '횡철'은 이걸 박살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절의  도취된 자아는 나의 가장 약한 고리이자 가장 큰 축복이었다. 내게 모험을 가능케 하는 뇌관은 저런 착각에서밖에 찾을수 없었으니까.

 

  어쨌든 횡철은 시작됬고 그 무시무시한 책들은 나를 덮쳐왔다. 왔는데, 솔직히 이해가 안됬다. 그나마 불교는 관심도 좀 있고 이것저것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공'이건 '연기'건 내말로 풀어보려고 백지앞에 앉으면 내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알고모르고를 떠나서 받아들이기 '싫은' 것도 있었다. 일례로, 서양근대철학자들이라든지, 설일체유부 공부할때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며 비웃어왔던 '논리적 원자주의' '본질' '실체'에 대한 믿음을 내가 엄청나게 굳게 가지고 있었다는걸 알게되었다. 유식이고 공이고 텍스트를 읽어도 또 그생각이 들고 그게 싫어서 말이라도 외워서 써보려고하면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 정말 기분이 꺼림칙했다. 아무리 뭐라해도 내 생각은, 아니 내 몸은 '뭔가가 움켜쥘 것이 있다'고 강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말할 것도 없다. 평전읽고 나서 든 생각은 '뭐지 이 미친 사이코는' 따위들 밖에 없었다. 처음 펴들은 논고는 자폐아들 낙서같기도, 수학 요점 정리 같기도 했다. 이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왜 저자리에 저 글자가 들어가 있는지조차 납득이 안됬다. 그 얇은 분량을 서너번을 돌려 읽어도 머리속엔 아무 실마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남들 어렵다는 책을 읽을때의 그 우쭐한 기분도 들지가 않았다. 확실히 기분이 좋지 않은 책이었다.

 

  근데 난 이걸 숨기고 싶어했다. 내가 이걸 완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건진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싫고 그렇게 보이는건 더더욱 싫었다. 그러니 글이든, 말이든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다시 꺼내 읽은 내 발제와 과제속엔 내 깜깜한 지점을 가리기 위한 유치한 장치들과 번지르르한 수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난 모르는걸 진정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얼 모른다고 적어내거나 진심으로 무지에 가득차 누구에게 뭘 물어본 적도 없었다. 나에게 공부는 그런 것이었다. 뭔가 잔뜩 집어 넣어놓고 아는 척을 한껏 해야 성과가 떨어지는 거고 모르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중간은 간다. 질문은 내가 어느정도는 결론을 내려놓은 걸 상대방에게 확인하는 작업이고, 무지는 나의 무능을 드러내기 딱좋은 치부다. 지금도 많은 시간 그런 지적 위선을 위해 공부를 한다.

 

  횡철하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지적이 이런 내 공부역정을 반듯이 찌르는 것이었다. '모르는 부분을 끌고 나가 글을 만들어오라.' 이 지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무 개념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발제나 공통과제에 '그럴까?' '아닐까?' '잘모르겠다' 라는 말을 담아 정말 글을 쓰시는 걸 보고 속으로는 아연실색했다. 내게 저런 말은 입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고 써써는 절대 안될 점수 깎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이걸 모르겠다고 써놓으면 그 다음에 무슨말을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모르는데 뭐 어쩔도리 있나.' 설사 아리송 하다가 좀 실마리가 보이는 부분도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던 것 마냥 글을 전면적으로 '조작했다.' 그게 맘이 편하니까. 내 일천한 바닥과 그걸 가리기 위한 주저리의 간극은 점점 커져갔고 횡철은 그럴수록  내게 무거운 짐짝이 되어갔다. 그런데 위기는 횡철에서만 찾아오지 않았다.

 

  횡철과 함께한 복학생 라이프는 순탄했다. 근데 너무 순탄한게 싫었나보다.  무지하게 외로웠다. 군대갔다온 아저씨들이 으레 그렇듯이 대부분의 느슨한 인간관계들은 다 끊어져있었고 여자친구는 학교오기전부터 없었다. 학교는 일종의 비장한 긴장감 같은게 흐르고 있었다. 먹고살기가 만만치 않다는 여론이 팽배해있었고 내가 알던 모든 커뮤니티, 꽈반, 동아리, 소모임 등은 다 빈사상태였다. 학교는 정확히 3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놀아도 되는)새내기, 고시생, (예비)취업준비생. 도서관은 살벌했고, 나처럼 '비주류' 책을 가지고 들어오는자는 심각한 이질감을 겪기에 충분했다. 외로우니까 힘이 팍 들어가서 그랬는지 청춘사업은 잘 안풀렸다. 나를 싫어하는 정말 다양한 이유를 듣는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친구들은 이제 서로 '놀때가 아니라'는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밥먹을 때 전략적으로 뭉쳤다가 각자의 여친에게 뿔뿔이 흩어지는 걸로 이 외로운 캠퍼스를 이겨내는 전략을 세운거 같았다. 나도 아직 저 전략에 버금가는 생존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벌려놓은 일도 많았다.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스터디를 만들어 돌렸고,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고, 학점은 풀로채웠다. 세미나는 2개. 벌려놓은 일에 일말에 책임감은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한눈을 팔지 않았다. 옛날엔 그렇게 달고 살았던 '잡스런' 일들을 하지 않았던것. 티비, 게임, 술, 돌아다니기.. 일주일의 대부분은 뭘읽거나 혹은 뭘쓰거나 하는일로 훅훅 지나가는데 잡아놓은 것들을 해내가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쫓긴다'라고 밖에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던 징그러운 일상에 점점 지쳐갔다. 금방 도취되지만 그만큼 빨리 실증내기도 잘하는 내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다 팽개치고 도망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학기말을 '방어'한 그날 이브하러 올라가다 실행에 옮겼다. 그날 이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 매일 술을 퍼대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었다. 꿀맛같은 생활이었다. 충분히 열심히 살았으니 이 정돈 당연하다는 식으로 다 팽개쳤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근 2주를 '쳐놀다가' 문득 '내가 뭐하고 있지?'라고 되물어봤다. 근데 난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훅 위기감이 들어 '그럼 뭐하고 살았더라' 라고 또 물어보니 부끄럽게도 횡철이 떠올랐다. 누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으레 '딴데서 세미나 한다'고 대답했었다. 그래서 복귀했다. 발제 팽개치고 연락 안받으면서 도망갔던 곳이라 그냥 쫓겨날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쭈뼛거리며 들어갔는데 또 살려주신다. 겁나게 부끄러웠다. 이런식으로 요래저래 횡철은 내 찌질한 본판을 바라보길 요구했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안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손놓고 놀다 왔으니 책들은 더욱 잡히지 않았고 지적받았던 문제들은 답보상태였다. 그런데 이 횡철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나태하게 공부할때마다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던 학교는 끝났고, 도망은 이미 한번 쳤고. 내가 뭘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고. 난 그런 자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만한 인격을 갖춘 위인은 못되고. 그러니, 다시 붙잡고 할 수 밖에.

 

  그렇게 횡철에 복귀해 몇주 더 깨지고 던져지다가 에세이를 쓰고 이렇게 후기를 쓴다. 에세이 발표날 막바지에 내 딴엔 나름 절박한 심정으로 선생님께 물었다. '이거 이러다 다 까먹을까봐 겁난다.'고 이 횡철마저 남는게 없다면 나는 이번 학기 내내 헛발질만 한 꼴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대답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당연히 다 까먹지 그러다 또 보면 조금더 기억나고 또다시 보면 더 기억나고' . 뭔가 빨리 손에 잡히는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배운건 붙들고 있어야 어디든 써먹는다는 믿음이 마지막 질문에 묻어난 불안감을 자아냈을테다. 그 불안감대로, 나는 이번 횡철을 통해 대체 뭘 알게되었는지, 그렇게 많이 지적받았던 문제들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는지 무엇보다도 난 좀 다른 인간이 되었는지 에 대해 확언할 수 없다. 불교가 뭐고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고 하는 것도 자신있게 내 언어로 쓸 자신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횡철은 실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패가 횡철에서 도망쳐 놀때 느꼈던 감정만큼 허무하진 않다. 세상에서 나만 아는 이 찌질하고 비루한 한학기를 나는 '횡철하는 사람'으로 보냈고  선생님 말처럼 어느 때인가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를 펴들때 난 언어게임을 떠올리기 전에 이 지난한 시간들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슬슬, 차마 입밖으로 내지르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사고와 언어와 세계의 한계 바깥이었던 영역에 대해 헛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시도로부터 다시 공부할 힘을 빌어오고자 한다. 헛소리는 의미없음의 동의어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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