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라는 텍스트 자체의 비균질성 그리고 성서해석의 자유!
채운 샘이 해준 <신학정치론>(10~12장) 한 줄 요약이었습니다^^;
성서는 한 가지 완벽한 의도에 따라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첨삭되고, 조합되고,
더군다나 많은 저자들이 참여하고 수정하며 만들어진 텍스트. 그만큼 비균질적,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텍스트.
그런데 우리는 비균질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체계로 모든 것을 포섭하려고 합니다.
체계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때로는 체계적이고 완전한 것에 대한 열망이 텍스트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 신학자들은 몇몇 교리들을 중심으로 성서의 모든 내용을 포섭하려 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성서를 미신적으로 읽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정한 교리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한 텍스트 전체가 단일한 의도로 관철될 수 있다는 목적론적인 관점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것.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가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주에는 <잡아함경> 제5권을 다시 읽었는데요.
수업 때 중요하게 짚고 간 것 중 하나가 <염마경>(권5, 104)과 <선니경>(권5, 105).
두 경은 단견과 상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단견은 직역하면 '끊어진다는 견해'?-.-;; <선니경>에서는 현세에서의 삶, '나'만을 인정하는 스승이 나옵니다.
<염마경>에서 염마도 말하기를, "(...)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다시는 아무 것도 없다." - 이 단견은 아트만과 같은 실체를 부정하겠지만, '없다'라는 것에 다시 사로잡힙니다.
상견은 '나'라는 영원불멸한 것, 어떤 본질의 불변성을 주장합니다. <선니경>에서 상견을 따르는 어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세에서 진실로 이것이 나다'라고 보고 '목숨이 마친 뒤에도 또한 이것이 나다''.
언어를 사용하며 우리는 어떤 식이든 '이것이다'라고 어떤 대상을 만들고 그것을 봅니다. '있다' 뿐만 아니라 '없다'는 것도 그렇게 만들어지지만 붓다는 그 중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선니경>에서 여래, 응공, 등장각의 말, '현세에서 진실로 이것이 나다라고 보지 않고, 목숨을 마친 뒤의 나도 또한 보지 않는다'.
이것이 '있다', '없다' 양극단을 치는 붓다의 비유비무(非有非無)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아리송하고 희안하지요?-.- '있다', '없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표상(?)을 만들고, 그것을 있는 대상으로 보고 생각하고 사로잡히는데 붓다의 가르침은 그 어떤 표상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기획인 것 같습니다. @,@
벌써 금요일, 다음 주에 만나요^^;
단견을 직역하면 "끊어진다는 견해"... 정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직역이로구나ㅋㅋㅋ 후기가 지난번보다 초큼씩 더 일목요연해지는 듯... 했는데 맨 뒤에 @.@로 끝나다니! 반전 후기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