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과 제자들의 저 문답을 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무상이 어째서 고인지를 도대체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지에 태람언니도 썼는데, 저도 반복^..^;)
무상이 고라고 할 때, 이 고는 통증, 고통pain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불편함disease의 문제. 어떤 불편함인가.
무상은 일종의 자연법칙이지만, 우리의 인식은 이 무상을 절단하고 붙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말나식-자기의식 없이 볼 수 없고, 인식한다는 것은 언제나 명색을 취함, 즉 실체화하는 것.
이런 인식은 무상과는 맞지 않고, 그 간극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식이든 불편함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비루한 예지만-.-) '영원한 젊음'을 표상하는 사람에게 늙어감이 당혹스러운 것처럼
색의 무상함은 -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즐거움을 누리게 되든 불행을 겪게 되든 -
색을 실체화(색으로 실체화?)하고, 그 색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식이든 불편함을 주는 것입니다.
'나'라는 의식 역시 필연적으로 이 무상한 세계와 맞지 않습니다.
무상이 고라는 것은 이와같은 우리의 조건 -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우리의 인식 조건 - 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고, 우리는 저 한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음음,,
스피노자의 정념, 신체, 능동수동에 대해서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계속생각하게 되는 건, 신체가 수동이면 정신도 수동이라는 것.
데카르트에게 물질과 정신은 일종의 인과적 관계라고 합니다.
물질세계가 나름의 법칙으로 있고, 정신이 그에 대한 표상을 갖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 대상세계와 연관되어 발생하긴 하나 - 그 나름의 메커니즘을 갖습니다.
'사과'라는 표상을 갖는 것은 '사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의 그 표상은 차라리 식의 작용이지, 대상이 먼저 있어서 그것을 떠올리는 게 아니죠.
아직 이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정신, 신체 각각의 메커니즘을 인정하기 때문에
대상세계를 뛰어넘어 인식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이 주목된다고 합니다.
계속 생각하게 되는 내용은 - 정신과 신체의 능동,수동은 함께간다는 것.
정신이 능동적인데 신체가 수동일 순 없고, 신체가 수동인데 정신만 능동일 수도 없습니다.
데카르트에게 많은 경우 정신이 능동이었던 것은, 정신을 상위, 신체를 하위의 것으로 두어서라고 합니다.
데카르트가 주목했던 것은 '의식'이겠지만, 이 의식은 결과적인 것이며 이행의 감정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능동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이해하는 것, 참된 관념을 갖는 것인데요.
채운샘은 붓다의 자비심을 예로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건을 겪으며, 심지어 그것이 상처가 될 수도 있으나, 사건에 대해서나 자기 감정에 대해서나
어떤 인연조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안다면, 정념에 사로잡혀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신체 수동, 정신 수동이 잘 이해가 안됐는데 생각해 보면
보통 어떤 경험을 하거나 사건을 겪는 우리 방식이 모호하고 수동적인 것 같았습니다~..~
알고~...~
밥을 많이 먹었더니 잠이 쏟아집니다.ㅎㅎ 음, 여하간 담주에 보아요~ 담주에는 올출석이길-//ㅋ
부처님의 자비를 배울 수 있음 좋겠구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