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5 09:49

11월 10일 공지!

조회 수 769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이번 주 <아함경>에서 핵심은 괴로움과 윤회였습니다.  

붓다는 괴로움의 본제를 알지 못하는 중생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근본뿌리는 애착이라고 합니다.

애착은 왜 생기나.

그것은 어떤 것을 실체화하는 '我見'에 의한 것이라 하죠.

아견에 의해 의식을 실체화하며, 

색에 대한 애욕과 집착을 상속시키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고 합니다.

라는 실체가 윤회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집착하고 애착하는 우리의 이 상속되는 게 바로 윤회라고요.

쌤은 우리가 붓다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욕망)을 그대로 상속받아 지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시키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셨죠.

수 억 겁 동안 애착과 욕망을 상속받아 똑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윤회하며 만들어가는 세상.

이런 세상에도 항하강 모래알 만큼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놀라운 사실!


토론하다가 이런 이야기도 나왔었죠.

깨달은 이들은 윤회하지 않지만, 이렇게 태어나 고통 받고 있는(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우리들은 

찌질이들인가... ^^;;;ㅎㅎ

우리가 이런 반발심(이 표현이 적절한지요?) 을 느꼈다면, 

이는 아마 윤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표상에서 비롯된 생각일 겁니다. 

찌질한 내가 윤회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끊어내지 못하는 미련과 집착이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찌질한 게 아니라, 그런 미련과 집착에서 나란 존재가 비롯되었음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겠죠.

저는 붓다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은데, 이번에 특히 그랬습니다.

괴로움의 본제를 알지 못하는 중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33, 34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유독 눈에 들어오더군요. 

붓다에게 중생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눈물, 고름, 피를 흘렸으면서도 

괴로움의 본제를 알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무명과 애욕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그러고도 여전히 게으른 무지랭이들.


예전에 읽었던 <무지경>이 떠오르더라고요.

거기서 붓다는 무명에 덮이고 애욕에 목매는 중생을 색, , , , 식의 기둥에 묶인 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개에 비유합니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이 비유가 굉장히 세게 다가오더라고요.

기둥에 묶인 한 마리의 개는 거기서 벗어날 생각은 않고

애욕의 찌꺼기들로 자기 목을 스스로 더 조여버리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많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바른 법에 훈습되어야 그런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나.

그걸 바라기는 하나.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가... 


괴로움과 윤회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붓다가 말하는 원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죠. 

붓다가 우바새들은 잘 지니고(수지受持잘 관찰하고 잘 행하여 원만하게 성취해야 한다고 말할 때, 

원만하다는 것은 두리뭉실하게 두루두루 잘 지낸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불교사전에서 원만圓滿은 완전하게 갖춘 것, 어떤 것의 성취나 완성이 매우 뛰어나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우바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지(受持)라고 합니다. 한 시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법을 잘 붙들고 잘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간단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겠죠.


또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과는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자기를 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악은 나의 의식과 행동이 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할 거리 : 불교에서는 왜 수행을 통해 항복 받아야 한다' 혹은 ‘버리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어법을 통해 드러난 불교의 사유는  무엇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유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잘못된 표상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도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답니다.

인간들은 신을 인간처럼 정념과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로 표상합니다. 

신을 인간처럼 상상하며 신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피조물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거죠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신은 곧 자연입니다. =자연=실체

노자가 "道可道非常道" (도라 일컫는 것은 늘 도가 아니다)라 하여,  

도는 표상될 수 없는 것이라 하는 것처럼, 

스피노자에게 신은 인간의 표상 체계로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 신은 자연 바깥에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쥐락펴락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모든 것이 태어나 살고 죽기를 반복하는, 생생불식하는 자연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신은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평면 같은 것이라고요.

<에티카> 정리 15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걸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네요! 별표 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스피노자가 볼 때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은 자신의 역량에 의해 필연적으로 모든 것들을 생산합니다.

그에게 정신 뿐만 아니라 연장도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신은 물질적인 것도 생산한다는 것!

데카르트에게 연장은 수동적인 것, 운동의 원인은 항상 외부에 있는 것이지만,

스피노자에게 연장은 운동과 정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동역학적인 활동을 의미하지요

스피노자에게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습니다

둘 다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속성 중 일부분일 뿐이죠

사유와 연장을 활동, 역량으로 파악하는 스피노자

이 점이 스피노자가 갖는 혁명성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에티카> 1부 정리 15와 정리 18을 좀 더 꼼꼼하게, 완전히 씹어 먹은 후에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다음 주 읽을 범위! 

1. 잡아함경 3 : 35, 36권 

2. 들뢰즈, <세 개의 에티카>(파일 올릴 예정이니 출력해서 보심 됩니다!) 

3. 내들러, <에티카를 읽는다> 4장 다시

4. <에티카>는 복습!

 

*간식은 태람이 준비합니다.(지난 시간엔 현옥 쌤이 준비해주셨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불경 읽는 일요일] 강독세미나 8 file 수영 2015.03.05 2862
공지 [3.2개강] 불교n / 화엄경과 에티카 29 채운 2015.02.04 2810
189 3월 2일 개강공지! 4 최태람 2015.02.27 352
188 시즌 2 최종 공지! 최태람 2015.01.16 380
187 2015. 1. 12 에세이 발표 공지! 2 최태람 2015.01.01 361
186 12월 29일 공지 2 최태람 2014.12.24 435
185 12월 22일 공지! 2 태람 2014.12.17 379
184 12월 15일 공지입니다! 2 최태람 2014.12.10 411
183 12월 8일 공지 최태람 2014.12.03 1406
182 12월 1일 공지입니다! 최태람 2014.11.26 410
181 11월 24일 공지 태람 2014.11.19 12471
180 에티카 1부 정의 공리 증명 file 인석 2014.11.17 12350
179 11월 17일 공지~! 태람 2014.11.11 8026
» 11월 10일 공지! 태람 2014.11.05 7693
177 11월 3일 공지! 태람 2014.10.29 6263
176 10월 27일 공지입니다! 태람 2014.10.22 7834
175 10월 20일 공지! 2 태람 2014.10.15 3161
174 10월 13일 공지! 1 태람 2014.10.08 3571
173 10월 6일 공지! 1 태람 2014.10.01 4638
172 9월 29일 공지임돠~! 1 태람 2014.09.24 4608
171 9월 22일 공지 입니다! 2 태람 2014.09.18 346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