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16 17:18

9월 15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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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16

9월 15일 3주차 후기

까먹고 있었는데, 오프라인으로 후기의 압박을 받고 씁니다.

아... 1장과 2장은 워밍업이랬는데 제 몸은 벌써 축축 쳐지는 기분입니다. 개념들이 둥둥 제 주변을 막 날라다니네요^^ (‘리좀’ 정도만 나와주면 참 좋겠는데^^)

그래도 철학책의 마력은 보면 볼수록 (아니 보면 볼 때마다) 개념들이 낯설게, 딴판으로 변한다는 사실! 혼자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나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개념을 번역하지만 강의를 듣고 나면 완전히 딴 세상인지라 이게 내가 공부한 개념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오직 혼돈만..... 그래도 그 낯섦을 즐길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즐기는 게 목표입니다ㅠㅠ)

이번에는 제가 완전히 헛다리짚었던 개념들 몇 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1. 다양체

지난 시간에 ‘다양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내 안에 다양하고 수많은 나‘들’이 있다, 이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우글거리는 집단 = 나.

 

그런데 훨씬 더 까다로운 개념 같습니다. 아니, 까다롭다기보다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개념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 뭐 이런 박 터지는 개념이 있는지. ‘하나’를 여러 개 나열해서는 안 되고, ‘여럿’을 하나로 환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들이 그야말로 동시에 포착되고 사유되고 공존해야 합니다. 이것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는 게 채운쌤의 강력한 주장이셨습니다. “다양체 개념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야 뒤로 가도 포기 안합니다!” 땅땅땅!

 

이게 잘 상상이 안 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나’라는 것을 해체하는 것이 너무나 겁나고 낯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나’나 여럿의 ‘나’를 상상하는 데에 너무 익숙합니다. ‘나’라는 동일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일단은 저번에 리좀편 발제에서 예시로 썼던 ‘역사’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국사, 동양사, 서양사, 이런 것들은 기존 역사의 사본일 뿐입니다. 역사의 ‘강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수많은 언저리들, 가장 전통적인 역사의 이미지를 벗어나면서 또 외부(이야기, 인류학, 우주...)와 접속하는 선분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역사’라는 영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선분들이 ‘역사’라는 영토를 다시 새롭게 뒤흔듭니다. 영토.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정말로 끊임없는 이런 운동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 번도 ‘맑스’ 자체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제 안에 맑스 씨가 분명 희미하게 계십니다. 누구를 공부하든 모두가 반드시 맑스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부 다 다르게 해석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맑스’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르게 맑스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맑스가 해체되거나 여러 분신으로 복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현상은 ‘맑스’ 자체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맑스는 그렇게 ‘살아있습니다.’ 교조적으로 박제된 맑스, 혹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맑스는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서식지’ 개념으로 밀고 간다면, 맑스는 이 수많은 담론과 혁명과 실천이 태어났다 싸웠다 사라지는 場(자연/기관없는신체/서식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역동적인 운동이 일어날 때에만 ‘맑스’라는 이름은 생생히 살아서 고유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나’가 있습니다. 무의식과 의식, 몸과 마음, 미생물과 혈관, 떼와 피부, 인간관계와 건강, 날씨와 감정이 분리되지 않고 계속 뒤섞입니다. 이것은 숨을 쉬는 세포막 이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세포는 외부와 교류해야 살 수 있지만 또 외부와 막을 쳐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막이 단단하게 닫혀도, 아예 없어도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 것 같습니다. 사실 삶도 죽음도 모두 ‘중간’에서 시작되고 또 끝납니다. 자연의 에너지 속에서 불쑥 태어났고, 죽음을 맞이하여 또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이렇게 계속 서식체 이미지가 나오는군요^^) 그런데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심연, 분명한 문턱이 있습니다. 바로 죽는 순간 저의 ‘막’은 아예 없어져버릴 거라는 겁니다. 저를 이루고 있던 수많은 기계들이 다 흩어져서 흙으로 돌아가거나 공기 중으로 날라가 버릴 겁니다. 더 이상 제 신체가 ‘서식지’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들은 다른 서식지로 옮겨가 새로운 다양체를 이루겠지요. 그렇게 저의 죽음은 다른 것의 ‘삶’으로 전환될 겁니다. 그러니 잘 살기 위해서는 일단 ‘자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체’(무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탈주체까지 포함하는, 다양체로서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한다거나 자연을 느낀다거나 하는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내 신체와 내가 발딛고 있는 이 시공간을 자연으로서 운용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양체’ 개념은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분열증적 사고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으니까요.

 

다양체 개념에서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공간화를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3차원이 아닌 2차원! ㅠㅠ A가 B를 포함한다, A와 B는 겹쳐져있다 등등의 집합의 이미지로 개념을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양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그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들이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서 내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기계는 다양체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기계 자체도 다양체입니다. 이런.... (들뢰즈가 중요한 건 다양체의 다양체들 뿐이라고 말한 게 이런 의미일까요.) 음, 일단 가장 쉽게 접근해보면 나와 타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와 타자는 함께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포함하거나 서로 겹쳐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횡단철학학인들은 서로 기계가 되어 ‘횡단철학’이라는 다양체를 이루지만, 학인들 하나하나 또한 다양체이며, 이것은 ‘횡단철학 다양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 안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우글우글 살고 있지만 그것들이 지구의 일부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지구를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함께’ 살고 죽고 싸우고 사랑하고 운동하는 그 힘들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지구가 아닐까요.

 

사실 이 곤혹스러움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다양체라는 개념이 제 몸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이겠지요ㅠㅠ 이게 과제입니다. ‘다양체’라는 개념을 개념화하기!

 

2. 무의식

무의식은 사실 애초부터 개념이 별로 없어서... 채운쌤의 강의 하나하나가 새로웠습니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가족이라는 영토에서 억압받음으로써 생긴 영역입니다. 그래서 모든 다양한 힘들을 가족 안에서 왜곡되어버린 성욕으로만 해석합니다. 그 속에서 무의식은 오직 엄마/아빠/형부(?)등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무의식이란 다양체들이 서로 접속하면서 만들어내는 힘의 흐름입니다. 에너지, 힘이라는 것은 ‘느낌’의 차원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는 몇 순간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느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나의 외부, 나와 이질적인 것과 만났을 때 그 낯선 힘이 나를 통과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느낍니다.’ 한마디로 늑대인간은 ‘늑대’의 힘이 자신의 신체를 통과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것들과 접속하고 낯선 힘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무의식’이라는 차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힘이 끊임없이 흐르고 표류하는, 무규정적인 영역입니다. 무의식은 억압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나로부터 탈주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낯선 외부에 손을 뻗어 접속하고, 새로운 강렬한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이 계속 탈주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진동할(살아갈,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은 오직 생산할 줄만 압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다양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

 

3. 군중 & 무리

군중과 무리. 카네티가 정리한 두 유형이었습니다. 수목형 집단과 리좀적 집단!

 

군중과 무리에 대한 개념에서 중요했던 점은, 군중과 무리가 특정한 두 가지 형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교차되는 두 가지 성격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무리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고 무리 속에서 군중의 조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뒤엉킴을 잘 봐야 합니다. ‘나’를 볼 때도, ‘조직’을 볼 때도, ‘자연’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크게 깨달았던 것은 우리가 구성해야 할 실천적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군중 속에서 무리(탈영토화)를 발견할 것인가? 어떻게 군중이 되지 않으면서 계속 무리를 구성할 것인가? 우리가 나무를 껴안고 살면서도 끊임없이 리좀을 지향해야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리좀이 더 좋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리좀은 그 자체로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나무인 까닭은 더 이상 진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한,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운동 자체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래 멈춰있다가는 ‘죽음’과 비슷한 상태가 될 테니까요. 이것이 차이와 동일성, 영토와 탈영토를 늘 동시에 사유해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떤 대의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첫 시간에 ‘중간에서 산다’는 말에 끌렸다고 썼는데, ‘중간에서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몹시 어려운 일 같습니다ㅠ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번째 고원에서 힘을 빼기에는 너무 가야할 길이 멉니다! 머리를 가볍게 하고, 다들 3쳅터와 함께 다음주에 생생한 표정으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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