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3 10:33

9/29 후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헐떡헐떡 이사를 마치고...

힘겹게 올라간 고원이 머릿속에서 날아가기 전에 붙들어 매둡니다@_@

(실은 <호모 로퀜스>를 받고 싶은 사심이 가득!!!!)

 

 

 

지층, 영토와 코드

‘지층’이라는 개념은 매우 광범위하게 쓰입니다. 현실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또 굴러가고 있는 모든 것들, 그것이 ‘지층’입니다. 왜 지층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지층은 그 고유한 시간성(역사)과 영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층은 단단하지만 그렇다고 ‘단일한 실체’는 아닙니다. 지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온갖 잡다한 돌멩이들이 축적되어야 하고, 또 몇 번의 습곡작용이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게다가 하나의 지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층 안에서도 중심을 벗어나 고유의 속도를 갖는 겉지층, 지층의 외부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곁지층, 질료를 제공해주는 밑지층, 이 지층 자체를 뛰어넘는 웃지층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지층에서 살고 있습니다. BG는 BG 나름대로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같은 PT 안에서도 서로 지층이 다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혁명이란 지층 안에서가 아니라 지층과 지층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혁명이라는 지층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지층에서 출발해서 그 ‘사이지층’의 틈새를 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층이 작동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한 축은 영토/속도/기계적 배치/내용. 또 한 축은 코드/운동(선)/언표적 배치/표현. 지층은 배치를 가지고, 배치는 선과 속도를 가진다고 저저저번 수업시간 때 배웠지요^^ 이 선들을 따라 고유의 속도를 내는 운동이 ‘영토’이고 이 선들이 서로 접속하는 지점이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층위입니다. 후자는 이 운동들이 접속하는 지점마다 특정한 ‘이름’을 명명하는 층위입니다. 사회적으로 등록되는 것입니다.

이 두 층위는 서로 대응하거나 합일하지 않습니다. 기타 등등 어떤 ‘지정된 관계’도 갖지 않습니다. 오직 끊임없이 서로에게 개입할 뿐입니다. 이 두 층위가 계속 갈마들면서 ‘사회’라는 배치를 만듭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회’란... 보통 생각하는 ‘사회학’과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내 몸 속에 있는 미생물들까지도 사회이니까요^^)

 

 

명령어/비물체적 변형/간접화법/다수어-소수어

명령어를 Slogan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와 닫는 것 같습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순수하지 않으며, 언제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변화/행동을 수반한다는 것 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힘의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언어의 정치성!

명령어는 언제나 비물체적 변형을 수반합니다. ‘비물체적 변형’이란 쉽게 생각하면 코드가 영토에 개입하는 지점입니다. 영토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특정한 테두리를 지어주고, 연속되는 흐름에 단절을 냄으로써 운동의 속도와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기계적 변화는 아니지만 반드시 기계적 변화와 연동되어 있는. 가령, 우리는 국사시간에 ‘5.18’을 배웁니다. 그런데 그것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익히고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5.18’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5.18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민주화, 한국 근대사, 전두환, <화려한 휴가>, 학살, 국가 유공자...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실천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5.18이라는 이름은 그 고유의 정치성을 가지고 언표적 배치를 떠돌아다니며, 우리 사회의 코드 중 일부를 형성합니다.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실천적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서 있는 영토에 따라서 그 코드는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5.18을 겪은 유공자들이 그 사건을 회상하는 것, 근현대사 시간에 수행평가로 5.18을 조사하는 것, 연구실에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5.18을 예시로 드는 것, 영화 <오월애>에서 말하는 것... 각자 이 사건을 명명하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전부 다 다른 사건입니다.) 이 명명하는 방식이 다 다른 것은 그곳에서 포진하고 있는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 때문이겠지요. 지층이 조금 다른 겁니다. 그래서 5.18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간접화법’입니다. 각자 속해있는 영토의 코드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지만 누군가들이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는 이 우글거리는 목소리들 속에서 건져올린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들은 소리들로 내 언어를 구성합니다.

코드가 영토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거꾸로 영토가 코드를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층위가 계속 갈마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층위가 갈마들 때에는 나름의 ‘게임규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암묵적 전제’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임시적입니다. 자의적이지도 그러나 이 게임규칙이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굴러갈 때, 그때 우리는 이 영토와 코드의 한 쌍(?)을 ‘지층’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언어 = 추상’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것이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의미작용(기의와 기표를 짝짓는 것)이 아니라 의미생성입니다. 그리고 ‘생성’은 늘 이중분절입니다. 영토와 코드, 내용과 표현이 짝지어지지는 않지만 함께 찰칵 집게발로 집어냅니다.

그렇다면 다수어와 소수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數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영어를 쓰는 사람보다 중국어를 쓰는 사람이 더 많고, 표준어보다 방언을 쓰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 채운쌤의 강의대로 문제는 소수어-다수어가 아니라, 언어를 소수적으로 쓰느냐 다수적으로 쓰느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언어의 ‘소수적 용법’은 딱딱한 지층에 균열을 내는 이중집게발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내용과 표현을 가로지르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비물체적 변형’을 가하는 것. 여기서 핵심은 ‘n-1’입니다. 안정적인 지층에서는 늘 모든 비물체적 변형이 ‘통일성/일자’를 중심으로 행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거했을 때, 언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치성을 띠게 됩니다.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여왔던 암묵적 전제가 와해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일부러 와해시키려고 하는 테러(?)가 아니라, 어떤 지층에서 탈주하려 애쓰다보니 저절로 발생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채운쌤이 예시로 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지식인’의 모습이 강렬하게, 짠하게 와 닿았습니다. 지식인들은 제국의 언어를 완성시키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제국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고 싶은 겁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1’이 없을 겁니다. 제국의 품위, 문법, 사유전개... 이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겁니다. 매끄러운 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몇 안 되는 단어만으로 절박함을 표현해야 하니까요! (물론 거기에는 완벽한 네이티브가 되고픈 다수적 욕망도 분명 있겠지만요.)

 훌륭한 문학작품, 철학작품은 기존의 언어/정치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할 때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애쓸 때, 그리고 마침내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벗어나 언어 자체를 더듬거리게 만드는 길을 찾아낼 때, ‘나’ 자신에게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겁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말대로 글이 나의 무의식을 백주에 드러내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고 경험하지 않았던 무의식-무리를 불러내는 겁니다. 글은 글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비물체적 변형을 가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이 더듬거리게 된 언어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어 또 다른 사건을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앎과 삶의 일치"를 표방할 때, 이때의 앎을 언어에 붙들어 매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언어는 그야말로 '...그리고...'를 위한 최소한의 거점에 불과합니다.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을 흘려보내야지만 다음 스텝을 뗄 수 있고, 내가 쓴 글마저도 그 순간(유효기간/유통기간ㅋ)이 지나면 버려야 합니다. 앎과 삶의 일치는 "내가 A를 알고 있으니까 A를 실천해야지"가 아니라,  끊임없는 "....And...And...And..." 속에서 오직 그 뛰어넘어가는 순간에만 일치되는 것이 아닐까요? 음~ 말이 꼬이네요. 지금 제가 뭔 말을 하고 있는 건지ㅡㅡ;;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고원을 지나면서 조심스레 생각을 풀어내봅니다^_^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불경 읽는 일요일] 강독세미나 8 file 수영 2015.03.05 2862
공지 [3.2개강] 불교n / 화엄경과 에티카 29 채운 2015.02.04 2810
30 다섯 번째 고원 후기 해자람 2011.10.15 1931
29 천 개의 고원-일곱 번째 고원 10월 20일 공지 태람 2011.10.14 2260
28 어떻게 기관없는 몸체가 될 것인가 file 현옥 2011.10.13 2551
27 6.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file 정규정 2011.10.13 1767
26 10월 6일 후기입니다. 진영 2011.10.12 1992
25 5번째 고원 후기 성복 2011.10.11 1657
24 [후기] 5고원 - 기표작용, 주체화 인비 2011.10.11 2719
23 5번째 고원 후기 김민교 2011.10.11 1568
22 <천개의 고원> 여섯번째 고원 10월 13일 공지 태람 2011.10.07 1739
21 네번째 고원 후기 정은하 2011.10.06 1901
20 4번째 고원 후기올려요~ 정현 2011.10.06 15274
19 4번째 고원 후기 성복 2011.10.05 3031
18 9월 29일 후기입니다! 진영 2011.10.05 2320
17 결석계 현숙 2011.10.05 3279
16 늦은 9월 29일 후기 김민교 2011.10.04 2383
15 9월 29일 후기 경은 2011.10.04 3268
14 [횡단철학] 9/29 후기-명령어, 간접화법, 비물체적 변형, 다수어와 소수어 인비 2011.10.04 2701
» 9/29 후기 해자람 2011.10.03 2187
12 <천의 고원>-다섯 번 째 고원 10월 6일 공지 태람 2011.09.30 2153
11 9/29 후기 정규정 2011.09.30 197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