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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요약을 올립니다. 후기는 따로 클리트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The Unforgiven)를 통해 세가지 선분을 그려보려 합니다.


횡철8주 후기, 2011.10.27(목), 채운 샘 강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1969년)를 보면 스토아 학파에게서 사건의 개념을 가지고 온다. 매일매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은 사건이 아니지만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사건이 된다. 사건은 일상의 리듬에서 삐죽 솟아 나오는 것이다. 사건은 의미를 동반한다.
시간은 1)주체와 상관없이 외부에 존재하는 형식이다. 2)아우구티누스는 의시의 문제로 시간을 본다.
들뢰즈-가타리는 시간에 대해 베르그송의 개념을 가지고 온다. 시간은 가깝게 현재에 부르는 순간 과거로 가고 현재는 또 미래로 간다. 시간은 무한한 운동이다.
스토아 학파는 시간과 물체가 있다. 시간은 물체의 운동과 더불어 있는 있는 것이고 물체의 이동이 시간이다.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물체의 이동과 더불어 된다.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만들어낸 효과이다. 하나는 물체적인 차원에 있다. 야구에서 안타는 볼과 방망이의 접촉이며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9회말 동점 투아웃 무사 만루에서 안타는 승리가 된다. 안타는 물체적 층위에서 의미가 없으나 안타가 승리의 주역이라는 의미를 가지면 사건이 된다. 사건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사건은 사라지고 없는 층위에 의미를 붙든다. 비물체적 언어적 사건을.....
살인은 칼과 인간의 몸이 접촉한 물체적 사건이고 우주적 운명이다. 우주적 차원에서 살인은 순수한 사건이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칭적 차원에서 살인은 분노, 슬픔, 공포 등 여러가지 감정이 일어난다. 우주적 차원에서 의미가 없으나 인칭적 차원에서는 의미가 부여된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적 차원과 인칭적 차원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를 사유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사건을 인칭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으로 근접하면서 사건에 일회일비하지 않는다. 스토아 학파의 많은 학자들은 자살을 하는데 그들은 지식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을 내가 능동적으로 받아 들이기 위해 곡기를 끊고 자살한다. 우주적 차원에서 운명을 보았고 자유와 운명은 모순이 아니라고 보았다 . 이들에게는 우주적 운명으로 사는게 자유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개인들이 사건을 의미화하는 것이 있구나 보았다. 의미를 사건화 한다.
영화 라쇼몽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목격한 4명의 진술이 모두 다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술자들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사건은 동시공간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누구가 거짓 진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목격자들의 시간은 다 다른 시간선이다. 현재는 없고 과거는 무한히 증식하고 미래도 무한히 증식한다. 과거와 미래만 존재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현재는 없다. 단편소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건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시간이 구성된다. 순수사건의 시간들만 존재한다. 들뢰즈는 여기에 스토아 학파의 이론을 가져와서 우주적 운명은 정해져 있고 누가 들어 갔는가만 다른다. 우주적인 사건은 순수한 사건들이고 거기에 내가 실현할 뿐이다. 우주적 사건의 자리에 내가 들어갔을 뿐이고 내가 들어가지 않아도 그 시간을 일어난다.

거기서 들뢰즈는 순수사건의 시간에서는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일이 있을 수 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펼쳐진다. 시간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시간이 사건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을 보면 무수히 많은 시간선이 분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시간 속에서 펼쳐질 것인가. 다른 도주선을 펼칠 수 있는가. 시간을 다르게 휘게 만든다. 내가 앞뒤로 계열화하여 펼칠 것인가를 실천하는 것인다.
낙엽이 지는 것은 순수 사건인데 첫사랑이 떠오른다. 인칭적인 사건이 된다. 첫사랑과 시간선으로 계열화되고 낙엽이 의미가 된다. 내가 가지 않을 무수히 많은 분할선에서 현실화 시킨다. 사건화 의미화 한다. 사건은 상상의 세계이고 시간을 펼치면서 산다. 무엇과 경험을 계열화할 것인가. 꽁트는 개그와 같은데 "제가 어떻게 될까?"가 중심이다. 들뢰즈는 현재를 운동으로 표현한다. 현재 자체는 없다. 우리는 미래와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펼친다. 막상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모른다.

첫번째 단편소설 <철창 안에서>
(369쪽 참조) 현재는 매번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 진다. 단편소설은 기본적으로 ... 사건은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는데 있었던 것 안에서 전개 된다.
헨리 제임스의 단편 소설들은 사소한 일을 통해 누구의 삶을 훔쳐본다. 단편 소설 <철창 안에서>에서 여자 주인공은 약혼자가 자신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일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약혼자 직장과 거리가 먼 곳에서 전신수로 일하면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전보를 보내는 사람들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전신수는 남자와 여자가 암호로 주고 받은 전보내용을 해독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난다. 전신수는 이들의 전보내용을 훔쳐보면서 전보를 보내는 남자가 유부녀와 사랑하고 있으며 둘사이는 사랑이 식어가고 있음을 알게된다. 정보를 보내던 그 남자는 유부녀인 그녀와 결혼하고 전신수도 약혼자와 결혼해 이 사건을 털어놓은게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커플은 남자-여자, 어른-아이 이런식으로 주체화가 짝을 동반함을 말한다. 나-아이, 나-배우자 커플이 있고 나-학생 등의 선분을 맺는다. 몇개의 선분이 반복한다. 일상에서 경직된 선분들은 무수히 존재한다. 나-아이의 선분은 경직되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소설에서 전신수는 약혼자와 선분이 있다고 경직된 선분인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상한 선이 유연한 선분이다. 전신수는 갑자기 선분을 끊고 비밀로 들어간다. 헨리 제임스는 볼 때 전신수는 커플의 암호에 들어가면서 일반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입자에 흔들린다. 양자들에 의해 입자가 튀어나온다.
(373쪽 참조) 평범한 여자가 비밀에 끌려들어간다. 우리들에게는 거시-정치가 있고 미시-정치가 있다. 누군가의 비밀에 끌려들어가게 되면 해석하게 된다. 미시 입자적 차원있고, 거시-정치는 경직된 선분이다. 의회 정치는 그 자체가 경직되어 있다. '나꼼수'(인터넷 정치 방송)를 들어보면 뒤담화인데 이것을 듣고 나의 도덕성을 정당화 한다. 거기에 거론되는 이들을 씹으면서 내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도 다를께 없는데 말이다. 경진된 분할선에서 입자가 생성되는데 주파선을 맞추는 것은 미시적 차원에서 우리 욕망을 건드린다. 나꼼수를 들으며 누군가를 매장하고 나는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욕망을 갖게된다.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것과 같다. 나도 나꼼수를 들으면 낄낄 웃다가 내 욕망을 보고 놀랐다.
비밀과 맺고 있는 관계는 유연한 분할선이다. 내 욕망의 입자들과 만나는 지점에서 탈영토화의 입자들이 튀어나온다. 지금 내가 넘어지는 사건이 현재이다. 근데 이들(선분)은 끊임없이 간섭하고 반영한다. 내가 규정할 수 없느 공부의 장도 입자가 만나 강렬도가 만나서 유연한 선이 된다. 이 여자(전신수)가 그 세계(일상)를 파괴하지 못하지만 이 선(탈주선)들이 이 선(경직된 선분, 유연한 선분)에 영향을 주고 밖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 누군가의 삶과 비밀에 헨리 제임스는 끌린다. 두 절편 계열이 만나서 폭발한 선, 섬광과 같은 무언가를 힐끗 보았다. 다른 유의 무엇이 있다. 이것을 본자와 안본자는 다르다. 경험하면 이미 다른 선위에 있다.
(378쪽 참조) 침묵, 암시는 내가 다른 입자를 보고 내가 들어가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경직된 선과 다른 것으로 들어온다. 다만 해석하는 과정에 무엇가로 도약한다. 얼핏 보는 것으로 달라지지 않았으나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는 세가지 시간 선이 있다. 어떻게 계열화 하는가.

두번째 피츠 제럴드 <금(파열)>
밖으로부터 타격이 가해진다. 이것은 우연이다. 금과 같이 미시적으로 외부에서 나에게 무엇인가 발생한다. 고려청자의 비취색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청자에 물,차,술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면서 미세한 금에 색이 스며든다.
강렬함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나에게 어느날 나도 모르게 다른게 발화한다. 도주선이 존재한다.
(380쪽 참조)단절-가짜, 우리가 도망(탈주)하려고 해도 그 안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덫안에서 소풍이다. 정당정치는 지지와 나의 이념과 상관없이 정당에 끌려간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 철학과 다르게 한미FTA를 전격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면 당내부와 노사모에서 그 지점을 비판해야 하는데 정당정치에서는 침묵한다.
단절은 과거를 휘발하고 또 다른 것을 사건화한다. 나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여행을 할 때 나의 일부는 금이 간게 된다. 다른 것과 새로운 균열을 만든다. 다른 사건과 생성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되기"이다. "동물-되기"는 사람과 동물이 내가 아닌 동물도 아닌 제3의 것으로 생성된다. 직선(분선)에서 금은 절편을 끊고 도망가는 도주(탈주)선이다.
광선망원경은 더 미시적으로 절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미시적 차원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덧코드화 한다. 미시적인 것까지 들어가 욕망을 절단한다. 자본주의가 필요한 것이 긴 망원경이다. (마케팅이나 광고가 긴망원경이지 않을까요. 마케팅과 광고는 사람의 깊숙한 심리를 건드려 욕망하게 만듭니다. 홈쇼핑의 이를 철저하게 보여준다. "마감 5분전 입니다", "몇 개 안남았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등등의 말은 사람의 심리를 자극해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383쪽 참조) 미시-절편성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멀리까지 보고 점친다. 아직 발견하지 않는 입자에서 발견한다. 길게 보는 미시-정치 오지 않을 것을 보려하는 방식인데 또 다른 선이 뒤섞인다. 우리의 일상에서 정치보다 중요한 미시적 욕망이 어떻게 결합되고 만들어 내는가, 기존의 또 다른 것과 또 만든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문제를 지각하는 문제와 기호계의 문제와 행위하는 정치 이론의 문제를 하나로 몰려있다. 나머지 없는 정치는 경직, 나머지 없는 시간은 경직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도 나머지가 보인다. 작품이 사적이라고 해도 나머지가 보이고 배치는 기호계, 지각, 정치가 선분들로 되어 있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선분이 뒤섞여 있고 배치가 있다.) 얽히고 설키고 있는 것이 배치이다. (리좀적 또는 그물망과 같이 얽혀있어 하나를 건드리면 거기에 연결된 선분들이 움직인다.)
미시-위반 무의식의 차원에서 저항하고 있는가. 70년대 68혁명은 실패했는데 분할된 것은 개인, 집단의 욕망들인 분출되었는 데 이 욕망들은 거시적 욕망(정치, 정당 등)에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 68혁명은 실패한다. 영화 <파리에서 탱고>는 68세대들이 팽배한 패배의식을 오다가다 만난 중년의 남자와 20대의 여자가 만나 섹스에 탐닉하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앙띠-오이디푸스>를 본 68세대는 마약과 자살은 한다. 이 책이 이용 당했다고 해도 들뢰즈는 책임을 통감하고 <천개의 고원>에서는 마약하지 않고 마약한 것과 같은 상태, 술을 마시지 않고도 술을 마신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지형과 내재성의 평면 사이에만 있다.

길게 보면 좁은 심연의 가교를 밟고 올라가 부수고 '분신'을 만난다.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이상의 소설 <날개>를 보면 아내와 나의 절편을 만나고 거기서 선분이 만들어 진다. 좋은 소설에서는 가지고 세개의 선을 발견할 수 있다. 선분의 다발을 만난다. 선분은 다양체이다. 주체가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들어온다. 무로부터 태어나 모델이 없다(융이 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법을 넘어서 자신만의 법을 세우는 것이고 들뢰즈가 말하는 스타일을 가지는 것.). 도주선은 실천 속에 발명이 된다. 금(파열), 비밀의 입자에 빨려 들어갈 때 도주선은 모델없이 발명된다. 도주선은 자기가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를 모방할 수 없다. 글쓰기 전에 다른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글쓰기가 된다. 기표의 주체는 선이 굳어질 때 만들어 진다. 의미 작용 주체가 생겨난다.
(389쪽 참조) 배치,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를 구조를 분석한다. 아마존 부족을 움직이는 구조를 친족체계로 분석해 낸다. 반면에 들뢰즈-가타리는 사회를 격자로 보았다. 배치는 시간과 공간을 같이 연다. 배치에서 하나만 바뀌어도 전체가 바뀐다. 배치를 중요하게 가져온다. 역동적인 판이다.
선과 관련해서 CsO가 무엇인가. 내가 그리고 있는 선은 무엇이고 어떤 절편을 가지고 있는가. 선이 어떻게 배치 되는가. 선이 아닌 입자처럼 만나게 되는 도주선이 그 과정에서 만들어 진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실천 행위이다.
1)각 선의 특수성: 유연한 절편선은 개인의 상상이 아니고 ...생성이다. 미시-정치는 욕망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몸짓, 체스쳐이다. 나치(히틀러)가 미시-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에 집권이 가능했다. 1934 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사랑하는 독일 국민여러분 5 년 안으로 모든 국민이 속도제한 없이 쌩쌩 달릴수 있는 국민을 위한 국민자동차를 만들겠으며 또한 오우토반 ( 고속도로 ) 을 만들어 위대한 독일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주겠습니다."라고 연설하며 독일인의 미시-욕망을 자극한다.
주체는 거시적인 정치가 아닌 미시적인 욕망(청치)이 건드리져 굴복하게 된다. 도주선은 세상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달아나게 만든다. 고리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현실차원에서 배치를 끊어내고 분자, 양자에 쏠리는 것이다. 도주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그리는 선이 있는 것이고 내가 그 선을 분석해야 한다. 자기안에 도주선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실패반 성공반이지만 도주선은 위험까지 있으니 실패가 51% 이상이다.
2)선들 각각의 중요성: 누군가의 도주선은 누구가의 도주선을 두둔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주선을 차단할 수 있다. 과거의 혁명은 지금의 우리에게 아름다울 수 없다. 언제나 합성의 문제이다. 내가 도주할 때 다른 선도 도주선을 그릴 수 있다. 이 선이 합성되었을 때.
3)선들의 상호 내재성: 유토피아는 다른 곳(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다 안에 있다. 기존의 문제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은 유연한 선분일 뿐 절편이 아니다. 60년 젊음은 마약하고 우드스턱에서 광분하고 분출한 후 깨어났을 때 패배의식만 남는다. 이 패배의식을 죽음으로 자살로 내몬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아래 영화줄거리 참조)를 보면 길버트 그레이프의 일상은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 엄청나 몸무게의 어머니, 저능아인 남동생, 노처녀 누나와 여동생과 살면서 편의점과 집을 왔다갔다 한다(경직된 선분). 그 일상에 집시처럼 여행을 다니던 또래 베키를 만나고 둘은 사랑을 하게 된다(유연한 선분). 길버트는 베키가 같이 떠나자는 손길을 뿌리치고 가족 안에 머문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길버트는 어머니와 같이 낡고 무너져 내리는 집을 불사르고(과거의 휘발) 가족들은 각자 길을 떠난다. 길버트도 남동생을 데리고 베키를 만나기 위해 길 위에 선다. 이때 길버트는 도주선을 그린다. 영화는 여기까지 이지만 이들이 만나 결혼을 하고 다시 평범한 삶은 산다면 길버트는 그곳에서 재영토화 되는 것이다.
4)각 선들에 고유한 문제들: 도주선에는 위험이 있다. 도주선은 다시 경직되고 거기에 갇힐 위험이 있다. 경직된 선을 오가던 사람이 어느날 섬광을 보거나 도주선 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섬광과 도주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혁명세대, 일상에서 한계를 보고 도주선으로 간 사람에게는 떨쳐버리지 못하는데 똑같은 것을 만나면 사태가 악화된다. 도주선에서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죽음의 선을 만들기 쉽다. 들뢰즈-가타리는 제발 죽지마라고 한다. 어쩌면 행복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도주선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선을 그리고 달아날 뿐이다. 계열화해서 선을 그려낼 것인가. 너의 시간을 펼쳐내는 것이다. 주체는 선분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
도주선 길버트 그레이프가 길 위에 설 때 과거의 나로부터 떠난다. 과거를 휘발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도주선이다. 새로운 하나의 의미이고, 의미가 사건이다. 도주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한다. 본인의 삶은 사건화하고 계열화하는 게 먼저이고 도주이다. 도주선으로 가면서 문득 깨닫게 될 때 그렇게 살고 있다. 검은구멍은 주체화이다. 


강의 계획에 이번 고원을 "사건과 연기(緣起)"라는 제목을 단 것은 연기란 우주적 차원에서 벌어진 것은 운명이고,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된다. 운명 속에서 연기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과 더불어 나타난다. 들뢰즈는 관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체, 주체라고 부르든 집합적 배치의 결과이고 불교에서는 연기와 다아있다. 상호작용하는 것 안으로 존재한다. 어떤 것도 실체화하지 않고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사건은 무수히 많은 인과 관계로 짜여 있다. 불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과들이 동시에 작용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건화할 뿐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나에게 의미를 갖는가를 볼 수 있지만 인과를 다 볼 수 없다. 깨달은 자는 사건을 넘어간다. 


<보조자료 설명>
<얼굴 여행>. 얼굴성 얼굴모양 코드화회더 있는 대 얼굴은 인간의 몸으로 특권화 모도 얼굴 이게 기표작용과 맞물려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게 얼굴이다. 잉여를 가지고 와서 얼굴성을 가지고 왔다. 얼굴성은 추상적기계이고 정치이다. 어떻게 얼굴을 해체할까. 관상은 얼굴이라는 것을 신체의 지도로 본다. 얼굴에 신체 기관이 들어있다. 관상의 얼굴상과 예수의 얼굴성은 다르다. 언표의 집합적 배치가 다른다. 관상에는 그 사람 전체의 생애와 관계가 들어 있다. 관상은 내 삶의 집합적인 배치이다. 관상은 신체와 얼굴을 연결함으로써 보는 방식을 다르게 한다. 관상에서 얼굴을 신체의 지도로 보았다. 


<문무관, 혹은 "너는 누구냐">예수와 신부의 얼굴이 말씀이다. 선문답에는 얼굴성이 없다. 질문자와 답이 있는데 1:1 대응이 아니고 질문을 박살낸다. 질문에는 자기 전제가 있다. 선문답을 제자의 수준에 맞춘다. 질문을 듣고 제자의 수준에 맞게 전제를 깬다. 모든 기표체계를 박살내는 게 선문답이다. 주체자체의 표상, 기호체계를 박살내고 아무 곳에도 기대 수 없게 한다. 그 순간에 질문자는 은산철벽에 부딪친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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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126113.jpg 


인구 1091명이 사는 아이오아주 '엔도라'에 사는 길버트 그레이프(Gilbert Grape: 죠니 뎁 분)는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집안의 가장으로써의 역할과 가족들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는 남편이 목 매달아 자살한 이후의 충격으로 몸무게가 500파운나 나가는 거구인 어머니(Momma: 다레네 캐이츠 분)와 정신 연령이 어린 아이 수준인 저능아 동생 어니(Arnie Grape: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34살의 누나(Amy Grape: 로라 해링턴 분)가 있고, 16살로 한창 멋내기를 좋아하는 미모의 여동생 엘렌(Ellen Grape: 매리 케이트 쉘하드트 분)이 있다.

틈만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하는 동생 어니는 어머니의 엄청난 몸무게와 함께 집안의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형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른다. 여동생 엘렌 또한 항상 불만에 쌓여 사는 길버트가의 또하나의 골칫거리다. 길버트에게는 터커(Tucker Van Dyke: 존 C. 레일리 분)와 보비(Bobby McBurney: 크리스핀 글로버 분)라는 두 친구가 있다. 터커는 패스트푸트 연쇄점을 개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밀크쉐이크도 많이 먹는게 꿈이다. 만나면 항상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보비는, 아버지가 장의자를 하고 있어서 영구차를 운전하고 있다. 길버트는 최신식 패스트푸드랜드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래된 램슨씨의 식품점에서 일한다.

길버트의 생활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괴상하며, 자기 생활에 크게 만족해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설명한다는 것은 마치 음악없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생활. 그 속에서 길버트는 동네의 카버 부인(Betty Carver: 매리 스틴버겐 분)과 불륜 관계를 갖는다. 물론 카버 부인에게 이끌려 그렇게 되었지만 답답한 틀 속에 갇혀 있던 길버트는 굳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한편, 캠핑족 소녀 베키(Becky: 줄리엣 루이스 분)는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엔도라에 머무르게 되고, 우연히 가스탱크에 올라 가 있는 어니를 따뜻하게 대하는 길버트를 보게 되고, 그의 순수한 마음에 호감을 갖게 된다. 길버트 또한 같은 또래의 여자인 베키에게 끌리게 되고 둘은 서로의 내면을 아껴 주는 순수한 사랑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어머니와 식구들은 그렇게 바라던 어니의 18번째 생일을 맞는다. 이 날 식구들은 그동안 쌓였던 갈등을 푸는 계기를 마련한다. 길버트는 베키를 어머니에게 소개시켜 주고, 베키는 다음 해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캠핑을 떠난다. 생일을 치루고 난 어머니는 평소에 쓰지 않던 침대로 가 눕는다. 식구들은 의아해 하지만, 한편으론 어머니의 변화에 기뻐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침대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며 모두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놀림감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집을 태워 어머니를 편하게 보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나 에이미와 동생 엘렌은 각자의 길을 찾아 새로운 곳을 떠나고, 길버트도 어니와 함께 베키의 도움으로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연기(緣起)란>
연기(緣起)란 "연(緣)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인 · 因")과 조건("연 · 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프라티트야 삼무파다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나다, 인연따라 생겨나다)"의 준말이다.[1] 한역(漢譯) 경전에서는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차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1] "프라티트야(산스크리트어: Pratītya)"의 사전적인 의미는 "의존하다"이고 "삼무파다(Samutpāda)"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겨나다 · 발생하다"이다. "영어: dependent arising (의존하여 생겨남)"[2], "conditioned genesis (조건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 (의존된 상호발생)"[3][4]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상호의존하여 생겨남)"[5] 등으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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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천 개의 고원> 열한 번째 고원 11월17일 공지 태람 2011.11.11 2124
46 <천 개의 고원>열번째 고원 11월 10일 공지 태람 2011.11.04 2610
45 네가지 적에 관해 (돈 후앙의 가르침 중) 인비 2011.11.03 3354
44 결석계입니다. 진영 2011.11.03 2000
43 결석계 정현 2011.11.03 1903
42 결석계 경은 2011.11.02 2137
» [천고] 8고원 강의요약 file 인비 2011.10.30 4411
40 천개의 고원-아홉번째 고원 11월 3일 공지 태람 2011.10.28 3963
39 결석계 정은하 2011.10.27 2063
38 결석계 현숙 2011.10.27 1657
37 천개의 고원- 10월 27일 여덟번째 고원 공지 태람 2011.10.22 2250
36 결석계 정현 2011.10.20 1736
35 결석계 경은 2011.10.19 1780
34 6번째 고원 후기 성복 2011.10.19 2246
33 6번째 고원 후기 해자람 2011.10.16 1691
32 보조자료 남산강학원 2011.10.15 1833
31 10월 13일 후기입니다. 진영 2011.10.1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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