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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은 『말과 사물』 이전에 단독으로 쓰여진 논문이었다. 「시녀들」의 핵심은 "빛과 언표" 또는 "가시성과 언표"이다. 이 그림은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의 에피스테메를 재현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을 관통하는 문제 의식은 꼭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라기 보다는 "그림에서의 빛" 그리고 "담론에서의 언표" 라는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쩌면 모르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모름이 우리의 앎을 구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모름이라는 것은 앎의 한 요소이며 푸코는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항상 모른다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앎을 성립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유한다는 것은 늘 사유불가능성을 자기 한계로 가지고 있다. 사유할 수 없음의 지대는 사유할 수 있음의 한계인 동시에 조건이다.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사유 가능한 것과 사유 불가능한 것을 규정한다. 우리가 어느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 안에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사고할 수 없음과 늘 같이 가는 것이다.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에만 해당하는 각각의 진리가 있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진리의 상대성이 아니라 어떻게 그 시대가 에피스테메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는가이다.

  17세기의 그림에서 램브란트의 자화상, 베르메르의 작업실,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을 봐도 벨라스케스 처럼 누가 재현하고 있고 재현되고 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이 벨라스케스의 요소와 비슷해 보여도 '시녀들'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시녀들>에서는 사람들이 잠시 동작을 멈춘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화가가 응시하는 자리와 공주가 응시하는 자리는 보통의 그림에서는 관람객의 자리이다. 또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화가의 자리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림 속 화가가 응시하므로서 존재하는 모델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의 자리가 누구의 자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일단은 모델의 자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캔버스가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가 없다. 또한 중앙의 거울에서 비추고 있는 군주들은 모델인지 관람객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모든 이들도 이 군주들을 주시하고 있는데, 주시되면서 주시하는 자리라는 재현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어느 하나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떤 것을 확정할 수 없다. 이 자리가 관람객의 자리로 결정되어 있는데 이 관람객이 이중적으로 보이는 자리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그 이중성이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것은 사실 고전주의 시대가 깨지는 징후이다. 대상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된다라는 깨지는 징후만을 놓고 보면 재현의 이중성이라는 것은 오히려 근대의 에피스테메에 가깝다. 여기에서 푸코가 고전주의 회화로 <시녀들>을 갖고 온 것이 애매해진다. 하지만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빛 때문이다. 이 방안의 모든 것들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주는 빛, 이 빛은 오른쪽 창문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창문이 그려져 있지 않은 원래 전제되어 있는 빛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의 빛은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주면서도 전혀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실제적으로 의식되지 않는 빛이다. 이 모든 조건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가시성의 조건을 묻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느냐만을 생각하면 된다. 푸코는 이것을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언어는 의식되지 않는다'라는 것과 연결 짓는다. 언어는 당연히 이성의 구조를 뒤따라 가면서 순서지어 주는, 질서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어의 존재를 서먹하고 낯선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근대 문학의 영역에서 이며 그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끊임없이 어긋난다. 그 어긋남에서 균열이 생기고 심연이 만들어지며 언어로는 다다를 수 없는 무의식에 까지 다다르려고 한다. 아니면 그 자체를 열어젖혀 무화시키려 한다. 그런 언어가 계속 거슬리는 것, 즉 의식되는 것이 근대의 언어이다. 하지만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는 창문, 거울 같은 것으로 그대로 비추는 것이었다. 의식 내부에 존재하며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서 담론의 조건이며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이 가시성의 전제가 되는 것은 회화에서는 빛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빛이 있다는 전제에서만 볼 수 있다.

  주체이면서 대상이기도 한 이 모호한 자리는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시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모든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서의 빛과 담론을 가능하게 해 주는 전제로서의 언표를 이야기하면서- 가져온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무언가가 부재함으로써만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거울 속의 두 군주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두 군주는 거울을 통해서만 보이는데 거울 속의 이미지는 실제가 아니다. 이들은 비가시적이고 그렇게 됨으로써만 나머지 것들을 존재하게 한다. 언어 역시 자기 존재를 내세우지 않음으로써만 사고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고 사고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런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보면 사고를 알 수가 있다. 일반이성문법도 이것과 같다. 왕들은 외부에 있어 비가시성 속에 물러남으로써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이 된다. 이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언어의 질서인데 언어의 질서는 언어가 아무것도 아닐 때에만 가능하며 모든 에피스테메의 중심이 된다.

  <시녀들>은 실제의 재현이면서 이 재현 안에 재현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는 점에서 푸코가 보기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투명한 재현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화면 앞의 자리가 대상이자 주체이기 때문에 근대적인 주체로서의 자리가 탄생되는 그런 지점이기도 하다.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도 빛을 전제로 하여 우리의 눈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죽음과 그것의 무상함이라는 비가시적 영역까지도 재현하려고 했전 고전주의 시대의 정물화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17세기의 눈속임용 회화 등은 빛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전혀 달라지게 된다. 푸코가 말한 화가는 벨라스케스, 마그리트, 마네 세명 이었다. 특히 마네는 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을 선취한 화가라고 하였다. 마네의 그림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데 그것은 마네가 그림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세계의 빛만을 그렸기 때문이다. 여인의 몸은 펑버짐하고 납작해 보이고 배경의 나무는 까만 기둥처럼 보이는데 사물들은 선명하지 않고 색이 뭉개져 있다. 나무는 공간감을 파편화하고 사람들 사이의 공간은 거리 조차 가늠되지 않는다. 재현으로서 존재하는 화폭이 아닌 화폭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물질성을 갖게 한다. 특히 <폴리 베르제르의 바>는 마네의 그림에서 세가지 양립 불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장 종합적이라고 극찬한 회화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시선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정된 관람자의 자리와 안정적이며 규범적이던 화가의 자리가 마네에 오면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던 하나의 고정된 자리는 부재하게 된다. 화폭 자체는 오브제가 되고 이 자체가 물질로서 보이게 된다.

  마그리트에 오면, 푸코가 문제 의식을 갖고 있던 이미지와 말, 보이는 것과 언표 이 두 가지의 관계가 그림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보는 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 언표 없이 가능한가, 거꾸로 우리가 무언가를 말할 때 이미지 없이 말할 수 있나. 두 개는 사실 독자적 관계는 없다. 하지만 본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교차한다. 이 그림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인 것은 푸코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에피스테메에 놓여 있다면 이 이미지를 보는 순간 우리는 파이프를 떠올린다. 우리는 파이프라는 언표를 보는 순간 '이미지'라는 어떤 상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미지와 언표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가시성의 영역, 즉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역이고 경험적 영역이다. 그전에 언표라는 것은 분명히 관념의 영역이다. 이 두 가지는 상관이 없는데 늘 엮여있다. 한편으로는 가시성의 체계를 분석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담론적인 것을 분석해야 한다. 언표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가시성을 구성하고, 가시성에 해당하는 것이 언표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분명 1:1 관계는 아니다. 푸코가 보기에 마그리트는 이 재현을 끊임없이 말과 이미지 사이의 균열을 보여줌으로써 조롱했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작업이기도 하면서 말과 사물을 전부 어긋나게 하는 것이다. 이 말과 이미지 사이의 균열에 의해서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서로 무관한데 서로 보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투명성이 깨져서 말과 이미지가 서로 어긋날 때 우리는 그로써 둘 사이의 어떤 다른 공간을 만들게 된다. 말과 사물의 일치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재현의 논리를 깼다. 이것이 첫번째. 두번째는 아롤리네르 시인의 칼리그램이다. 이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읽을 수 없다. 이것을 읽는 순간 우리는 볼 수 없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이것처럼 가시성과 언표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칼리그램을 예로 들어 둘 사이에는 공통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칸딘스키와 클레에 와서는 언표할 수 있는 것과 보이는 것과의 공모 관계를 완전히 깨버린다. 칸딘스키는 그림에서 일체의 언어 표상을 지우기 위해(표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즉흥 구성 방식을 취한다. 즉흥 구성 방식은 회화의 내적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색들의 내적 논리와 상호 연관성의 논리를 만들어서 선을 그리고 점을 찍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적 연관성들이 만들어 내는 질서가 생겨난다. 색의 논리, 점의 논리, 선의 논리를 아주 엄격하게 추상화하는 작업을 거쳐서 회화가 어떤 표상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칸딘스키는 표상에 의존하지 않는 음악과 같은 상태를 꿈꾸고 나아간 것이다. 칸딘스키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차가운 추상이라고 말해진다. 노랑은 팽창, 파랑은 수축이고 수직, 수평, 곡선, 색채의 논리로 가지고 만드는 그 내적인 조직과 질서는 칸딘스키를 차가운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에 반해 클레는 직관으로서 이것을 파괴한다. 클레는 회화 공간에다가 기호를 뒤섞는다. 예를 들어 화살표나 상형문자, ABC등 언어 문자도 많이 썼다. 동양화에서 그림에 글씨를 쓴다고 하면 -애초부터 '재현'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언어 기호를 쓰면 기호는 납작한 공간이 된다. 서양에서 이미지는 그것이 실제를 반영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납작한 공간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다. 클레는 그림에 기호를 써서 직관적으로 우리의 시각을 보는 무의식적인 힘을 조직해 낸다. 만약 여기에 기호가 없다면 생면들이 그라데이션으로 오르락 내리락 유동하게 되는데 여기에 화살표가 있으면 화살표가 짓누르는 어떤 힘의 방향성이 생긴다. 언어가 주는 것보다 즉각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화살표와 같은 기호는 이 회화 공간, 즉 직관적인 공간을 보는 사람의 작용에 따라 -만들게 되는 그런- 유동성을 갖는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재현의 공간을 넘어갔다. 그래서 언표와 가시성은 회화 공간에서 분리되기 시작했고 더 이상 텍스트에 지배 당하지 않고 실제성에 지배당하지 않는 독자적인 회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푸코는 본다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본다는 것과 언표(언어)라는 서로 무관한 것이 어떻게 연결시키는 에피스테메 위에 놓여 있는가를 고찰했다. 『말과 사물』은 언표와 가시성의 두 가지 문제를 중요한 사유 속에 넣고 생각하고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 '말했다'라는 것은 언어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언표는 언어의 현실화로 실질적으로 언어를 부여하는 차원이다. 우리는 언표를 통해 언어를 알게된다. 언표가 언어를 전제하는 것처럼 빛은 가시성을 전제한다. 빛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다른 어떤 조건 속에서 빛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17세기에는 빛을 전제한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려냈지만 19세기에는 내눈에 보이는 빛이 중요하게 된다. 이처럼 가시성을 드러내는 조건이 달라진다. 언표가 어떤 언어를 전제하는 것처럼 빛은 가시성을 전제한다. 17세기의 빛이 재현의 조건이었다면 마네에 와서는 달라진다. 그림에서 빛은 전혀 다른 조건과 그 위에서 전혀 다른 사용법을 가지게 된다. 가시적인 것은 볼 수있는 것이나 지각 가능한 사물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은 그 말 자체에 무의식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 시선이 도달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라는 현재적인 경험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 속에서, 즉 우리의 체계 속에서 그 구성을 같게 하는 것이다.

  푸코에게 있어 앎은 내가 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계속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앎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새로운 실천적 지점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옳다는 것에 대해서 설득시키거나 싸울 필요가 없고 각자가 진리를 생각해 내는 과정 속에서 올바름이 산출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어떤 과정 속에서 진리를 구성해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서로가 변형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과 일반 민중들의 앎이 구성되는 방식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진리도 서로 다를 것이다. 이 과정을 인식한다면 상호적으로 전혀 다른 지형에서 만날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푸코에게 그것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경험을 통한 새로운 지대이고 들뢰즈는 그것을 '되기'라 명명한다. 되기는 상대방에 대해서 역지사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토를 떠나 제3의 지대에 이르는 것이다.

교환하기.

  르네상스 시대의 부는 금속 자체가 부였기 때문에 금과 은의 무게가 중요했다. 하지만 고전주의 시대에는 화폐 자체가 가치를 나타내는 매개물이 되어서 금과 은이 여전히 화폐로써 쓰이지만 그것은 금속의 특성과 희귀성 때문이고 중요한 것은 교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폐는 더 이상 귀금속을 쓸 필요가 없었다. 화폐가 기호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체제 안에서 보증이나 담보로서의 기능만 있으면 재현의 수단이 되어 쓸 수 있었다. 푸코의 관점에서 중상주이든 중농주의든 부가 창조되는 것은 유통과 지대라는 측면에서는 같다. 표면적인 문제는 토지가 우선이냐 교환이 우선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부를 창출하려면 노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이 된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노동에 대한 분석이 없다. 그래서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부와 19세기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이 시대의 화폐는 가치와 교환된다. 그래서 화폐는 재현이다. 가치를 표상하고 있는 것 때문에 교환이 가능해진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먼저 올린 글에 댓글 달아 주셨는데 어쩔 수 없이 먼저 올린 글은 지웠어요 (다시 죄송)..저는 후기 쓰는 것도 어렵네요. ㅠㅠ;; 교환하기는 7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하신다고 그러셔서 저도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 jerry 2014.01.05 12:53

    허허헉~ 길다! 후기 쓰기도 어렵지 물론....^^ 담 후기는 정말 간단 요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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