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표란 대체 무엇인가? 담론은? 여전히 감이 잡힐 듯 말 듯한 가운데 <지식의 고고학>이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조별토론을 하면서도 멘붕을 거듭했는데요. 채운쌤은 언표와 담론에 대해서 시간별 교통량을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담론의 차원에 머문다’는 말은 말해진 것/말해지지 않는 것의 심층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교통량을 표시하는 스크린에서 어떤 일정한 규칙성과 불연속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언표의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라고. 여기서 언표란 기능, 함수, 그 자체로 관계를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말을 할 때의 그 관계 안에서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니라, 발화하는 말 자체에 관계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를 ‘언표로 본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과 배치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그 조건과 배치의 가능성, 혹은 개연성을 전제하고 있는데 그 가능성의 집합을 언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구에 의미를 주고 명제에 진리값을 주는 언표. 그리고 언표의 표면을 ‘보는 것’을 푸코는 말 합니다. 어떤 텍스트를 분석할 때 저자와 시대, 그것의 속뜻을 알아보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 텍스트가 발화될 수 있었던 ‘모든 평면’을 보는 것. 그 텍스트가 관계하고 있는 것, 배제하는 것, 규칙성, 전제를 드러내는 것이 푸코가 말하는 ‘언표로 본다’는 것입니다.
저자와 시대, 구조만 보지 말고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다 고려 하라는건가?-_-?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도 사실. 이 ‘본다’는 말은 여전히 아리송한 말입니다. 현실화의 잠재성, 말해진 것들을 잠재적 차원에서 고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게 심층을 분석하는 것과는 뭐가 다른지 말입니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언표로 본다’라는 건 어떤 텍스트를 의미화 하거나 가치 부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배치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어떤 기호를 언표로 볼 때, 그 기호의 전제를 본다는 것은 그것이 품고 있을 깊은 무의식을 추리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기호가 어떤 기호와 관계해서 계열을 만드는가, 그 기능을 본다’는 것입니다. 출근시간대의 꽉 막힌 도로처럼 규칙성을 가질 수도 있고 완전히 동떨어진 곳의 사고차량처럼 내가 있는 곳까지 꽉 막히게 할 수도 있는 언표의 기능. 그때 언표란 어떤 단위도 아니고 어떤 규칙성도 아닌 ‘가능성의 집합’으로서 존재합니다. 요컨대 한 텍스트의 발화는 단지 저자의 의지나 시대의 영향 때문에 쓰여진 게 아니라 발화될 어떤 개연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밭에서 지렁이는 나올 수 있어도 용은 출현할 수 없는 그런 개연성?^^ 근대는 인간이 출현하면서 인간의 죽음을 출현시킬 수 없는 배치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 (만약 있다면 그건 ‘희박한’ 탈주라고 합니다.)
이런 개연성을 중심으로 담론이 출현하고, 우리의 앎이 구성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는 게 푸코의 언표와 담론적 실천인거 같은데... ㅇㅁㅇ... 우리는 지식을 어떤 공간에서 구성하고 있는가? 그 ‘장’, ‘공간’, 전체 배치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ㅇㅁㅇ 대체 안다는 건 뭐고 이걸 이해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ㅠ0ㅠ 지식의 고고학이 딱 한 시간 남았는데 점점 모르겠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ㅠ0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