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2 13:19

10월 8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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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했던 날보다 하루 늦게 올려버렸네요. 죄송합니다. -- 요즘 태어나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체력과 정신 모두 아슬아슬하게 한계치를 달리고 있네요. 후기도 에세이 쓸 때처럼 날을 세워서 간신히 작성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난방의 정리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나름 텍스트도 다시 읽고 강의록 개념 짚어가며 정리했으니 읽어보시고 잘못된 점 지적해 주세요.

 

비극의 탄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0까지는 그리스인들에게서의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였죠.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염세주의를 내비쳤는데,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염세주의를 넘어갔는지 주목합니다. 나머지는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이해로 인식으로 모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학문적 낙관주의를 비판합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당시의 낭만주의와 기독교적인 것들에 대해 반론을 펼친 겁니다. 크게는 그리스문화에 대한 탐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기 시대 학문지평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니체가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가 뭐였을까요. 바로 실존의 정당화(미학화)’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실존문제를 형이상학적 비약이나 종교적인 초월이 아닌 것으로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니체의 답은 우리의 삶을 부정하거나 그 정당성을 자기 외의 것들에게 맡기는 것들과의 투쟁 의지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니체가 어떠한 개념으로 어떻게 자기 시대와 맞짱을 떴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아폴론은 개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자기 인식을 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가장 신성한 세계 법칙으로서의 이 경계선을 거듭 상기시킴으로써 개별 존재들을 안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폴론적 경향으로 인해 형식이 이집트적 뻣뻣함과 차가움으로 굳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호수에 일렁이는 하나하나의 물결에 궤도와 영역을 지정해줌으로써 호수 전체의 움직임을 마비시키지 않기 위해, 이따금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큰 물결이 일방적인 아폴론적 의지가 그리스 정신을 추방해 유폐시키고자 하는 저 작은 동심원들을 모두 휩쓸어 파괴해버린다.

 

이 구절을 처음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실은 아직도 이러한 대립구도를 떨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아직 쉽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아폴론은 저 호수 표면의 물결처럼 빛나는 자입니다. 아폴론적인 것은 개체들의 현상형식으로서 그 빛은 대낮에 개체를 개체로서 드러내주는 힘이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이러한 아폴론적인 것의 현상형식을 파괴하는 힘이며, 개체를 개체로 만들어 주는 근원입니다. 호수의 잔잔하고 안정적인 표면 아래의 심연 같은 것이죠. 그리스인들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체 이전의 차원에 대한 의문과 개체가 다른 것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등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러한 개체화의 원리를 니체는 생의 의지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쇼펜하워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니체는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개념을 창안하지 않고 기존의 개념들을 구부렸다고 합니다. 이게 무얼 뜻하는지는 앞으로 차차 알아가야겠고.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근원적 일자를 쓸 때는 기존의 철학에서 의미하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라고 합니다.

우선 쇼펜하워의 개념부터 보겠습니다. 쇼펜하워에게서 개체가 개체로 만들어지는 원리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개체가 갖는 형식이라는데 아직 쇼펜하워를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실존하는 개체들의 근거로써 최후의 근원적 일자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근원적 일자는 모든 현상이 생겨나는 유일한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현상 세계는 우리의 의지가 객관화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관적 표상으로만 존재하는 거죠. 니체가 쇼펜하워의 개념을 인용한 건 여기까지입니다.

쇼펜하워의 논리에 의하면 개체의 생의 의지는 저마다 다르며 맹목적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각기 그 본성에 따라 욕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한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는 거죠. 여기에 대한 쇼펜하워의 해법은 아예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는 개체의 근원에 대한 부정임과 동시에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쇼펜하워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기나긴 고통 이후에 인생 자체를 폐기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예술마저 인생의 비관을 정당화하는 매개였던 거죠.

니체는 쇼펜하워의 염세주의를 부정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 생의 의지란 개념을 전혀 다르게 구부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은 고통스러워하는 비밀 의식의 디오니소스이며, 개별화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는 신이다. 그에 관한 불가사의한 신화들은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소년 시절 거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으며, 이런 상태에서 자그레우스로 숭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찢긴 신체, 디오니소스의 원초적 고통은 마치 공기, , , 돌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개별화의 상태를 모든 고통의 원천이며 근원, 즉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의 미소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탄생했고, 그의 눈물에서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여러 신화를 통해 디오니소스가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생명이며, ‘그 근원이 찢어진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두 번 태어난 자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번개에 타죽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다른 신화에서는 헤라에 의해 찢겨진 채로 태어났습니다. 또 다른 신화에서는 그 찢겨진 몸뚱어리가 데메테르와 아폴론에 의해 되살아났다고도 합니다. 니체에게서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인간이 애초에 고통 받는 개체로 찢겨진 채 태어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도, 다른 개체들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후에도 개체들은 끊임없는 찢겨짐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디오니소스의 찢겨진 신체가 자연의 공기, , , 돌 등으로 변하는 것처럼 자연을 닮은 우리 인간 또한 끊임없이 찢겨지고 있는 존재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 개별화의 상태를 니체는 모든 고통의 원천이며 근원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의 조건이 그 자체로 고통이란 거죠.

어떤 철학이나 종교든 인간의 태어남과 현실적 삶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나죠. 전통의 형이상학에서 개체들의 실존은 근원적 일자를 목적으로 가짐으로써 정당화되었습니다. 삶의 이유를 신과 외부의 도덕에 두고 인간의 고통을 오직 그곳에 내맡기는 겁니다. 아니면 쇼펜하워처럼 극단의 염세주의로 빠지든가요. 니체가 보기에 어느 쪽이든 허무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둘 모두 인간에게 어떠한 물음과 의지도 불허하며, 인간의 실존을 부정하니까요. 니체가 당대의 기독교와 데카당스 양쪽 모두와 싸운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기존의 가치는 물론 새로운 가치마저도 인간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으니까요.

니체에게 삶, 또는 실존의 긍정은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며 이는 바로 실존의 긍정과 연결됩니다. 고통을 겪어내라는 것은 결코 수동적으로 감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고통 앞에서 오히려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데요. 그렇다고 이 의지란 것이 우리 뜻대로 발휘하는 힘만은 아죠.(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잘 안 잡히니 이걸 뭐라 할지 쓰기도 어렵습니다.--)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을 넘어선 다른 의미인 것 같은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고통이란 말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니체의 고통이라는 말은 영어로 ‘suffuring’과 같다고 합니다.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의미보다 삶의 문제들을 겪는다는 의미가 더 큰데요. 불교에서의 를 설명하는 방식과 어딘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고()는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생로병사 등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들이죠. 오히려 이를 깨달음의 자리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결국엔 그 근본 번뇌를 멸하라고 하구요.

니체에게서 고통이란 것도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의 실존을 이루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넘어서는 힘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찢겨진 개체로 존재하면서도 다시 부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삶 어디에도 초월적 존재에 의해 구원이나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실존의 찢겨짐과 되살아남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죠. 그렇다고 우리의 고통을 회피하거나 떠맡길 곳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거죠. 때문에 자기 삶의 심연과 마주해 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다음의 고통을 겪어낼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이해한 니체의 생의 의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을 피하고 맞서는 게 굉장히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고통을 겪지 않고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맡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모두 내 삶의 근원을 나 아닌 것에 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삶의 부정이죠.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지만요.TT)

니체게서는 쇼펜하워가 삶의 체념이라 일컬었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도 전혀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 전에 잠시 그리스의 신들에 관해 보자면, 그들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질투하고 싸우고 배신하는 등, 그들의 삶은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멸하죠.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니체는 신화를 통해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신들의 세계는 그리스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삶을 투영한 것입니다. 또한 신들의 불멸성은 인간 개체가 아니라 그 종의 고통이 연속해서 계속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떤 개체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실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 비극이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건 바로 이러한 인간 실존의 본모습입니다. 이를 쇼펜하워처럼 삶의 비관이나 염세주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고통 너머의 것을 봅니다.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그가 두 번 태어난 자란 거죠.

 

프로메테우스를 독수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신화를 디오니소스적 지혜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이것은 어떤 힘이었는가? 이것은 음악의 헤라클레스적 힘이다. 그것은 비극 속에서 최고로 발현되는 힘이며, 신화를 새롭고도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해석할 줄 아는 힘이다.

 

한편에는 화려하고 빛나는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웅들이 뒤집어쓴 가면 속에는 삶에 대한 온갖 고통을 겪어내는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들, 혹은 디오니소스가 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의 남편이 되며 남매의 아버지가 된 오이디푸스의 기구한 삶. 이는 그리스 영웅들이 지녔던 것이며 한 개체가 개체이게 만든 현상 형식들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 비극에 이러한 파멸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비극에는 고통과 -도취가 공존합니다. 위 구절을 읽고 음악의 헤라클레스적 힘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바로 이 고통과 함께 공존하는 -도취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개체가 근원으로 소급되면 디오니소스적인 분위기가 발현됩니다. 망아의 황홀경 같은 건데 이는 단순히 의식의 몽롱함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힘의 상승과 충만의 느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근원적 일자, 즉 자기 실존의 배후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실존뿐임을 직면하고 그것 외의 것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에 따른 쾌-도취도 다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실존의 고통을 넘어설 때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어린 시절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난관들을 하나하나 감당하고 겪어냈던 것처럼 말이죠.(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스의 비극의 주인공들은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고 합니다. 비극을 통해 예술에 대해서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데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체험한 인간은 쇼펜하워가 그랬듯이 강한 염세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 매 순간 되풀이 되는 삶의 문제들을 겪어낸다면 죽음 또한 우리가 겪고 받아들여야 할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미리 두려워하거나 겁먹을 필요 없죠.

사실 니체가 삶을 되풀이되는 겪음으로 보았다는 것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의지를 다르게 사유한 부분을 읽고 생각난 게 있었는데요.

10대 후반과 20대를 생각하면 온통 염세적이고 우울한 기억뿐입니다. 여러 사건들 앞에서 염세적으로 모든 걸 체념하거나, 아니면 말도 안 되게 생떼를 쓰며 거부하는 태도만 보였습니다. 주어진 삶 자체를 끊임없이 부정하거나 포기하며 살았던 거죠. 니체가 삶을 겪어낸다고 할 때 이러한 부정적 힘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한 힘은 결국 파괴 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제가 어린 시절 미친 듯이 좋아했던 너바나의 커트코베인도 온갖 염세와 비관을 부르짖다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죠.--)

이제 니체의 강적 바그너에 대해 얘기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니체에게 바그너란 개인 바그너가 아닙니다. 그에게 바그너와의 혈투는 바그너적인 시대정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데카당스와의 싸움이었죠.

바그너 작품에서 니체는 구원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오페라 속 인물은 늘 구원받기를 원한다죠. 그리고 그 구원의 전제는 절대적인 믿음이랍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물음과 프로메테우스의 도발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바그너가 세운 새로운 음악적 세계에 의한 비전과 구원만이 존재하죠. 그런데 이러한 비전과 구원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 극복하려 했던 기독교와 꼭 닮았습니다. 결구 그들은 기존의 가치에서 신만 없앴을 뿐인 거죠. 기독교가 신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었다면, 바그너의 구원은 결국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바그너적 비전과 구원의 구도는 훗날 나치에게로 이어집니다. 기존의 가치 파괴가 더 큰 부정적으로 힘으로 작용한 거죠. 때문에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단순히 기존에 대한 부정으로만 인식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기만 하는 힘은 그보다 더 큰 부정을 낳는 법이니까요.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난 자입니다. 그는 분명 찢겨진 채 태어났지만 그의 몸은 데메테르 여신과 아폴론에 의해 다시 부활합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찢긴 몸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물론 인간의 실존은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또한 그 고통 속에 이를 넘어갈 힘이 있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기존의 가치를 대변하는 자신의 가문을 배신했고, 데카당한 영웅이자 니체에 의해 바그너로 비유되었던 테세우스를 따라 먼 여행길에 나섰지만 또 한 번 더 배신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배신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그녀를 구한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그녀를 구한 방식이 매우 멋집니다. 비탄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벗지 않던 아르아드네의 무거운 금관을 하늘 높이 던져 버린 거죠. 이로써 그녀를 온갖 부정정적인 힘으로부터 구해낸 거죠.

이 신화는 디오니소스의 긍정이 단순히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실존에 대한 긍정이 긍정이 되려면 제2의 긍정이 요구된다는 거죠. 이에 대한 들뢰즈의 글이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 저는 이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으로요. 우리 몸만 보더라도 통증과 치유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야말로 매 순간 우리의 실존은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들뢰즈가 니체로부터 발견한 것은 그의 저항이 재코드화에 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니체를 맑스, 혹은 프로이트의 저항을 비교하면 이해할 수 있는데요, 가령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했지만 결국 이를 가족으로 코드화해버렸죠.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실존의 문제를 넘어서면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근원은 오직 우리 삶밖에 없으며, 때문에 삶의 어떤 문제를 넘어가면 거기엔 또 삶의 문제가 있어 그걸 넘어가는 것 외에 다른 게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건 바로 그 삶의 장 외에 다른 게 없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겪어낸 고통은 다음의 고통을 겪어낼 또 다른 힘이 되구요.

 

실은 비극의 탄생과 관련해 니체의 예술에 대해서 좀 더 얘기했어야 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스리슬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 배경지식이 없어서인지 잘 안 읽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니체의 텍스트 자체만으로는 잘 안 그려집니다. 계속해서 읽어가며 이해해야할 것 같습니다.

 

 


  • 채운 2014.10.12 14:37

    중국난방? 이젠 난방마저도  중국난방인 거냐.... ㅊㅊ  글고 언제 니체가 '생의지'를 얘기했느냐... 정말 중국난방이로다...

  • 수경 2014.10.12 15:28

    ㅋㅋㅋ 듕국난방 대박. 뭐 그건 그거고, '강함의 염세주의' 이야기는 제가 이해한 거랑 쪼까 달라요. 위의 정리만 놓고 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체험한 사람은 심각한 염세주의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니체가 고찰한 대로라면 우리는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다, 대략 이런 이야기인 듯한데,,, 제가 수업시간에 이해한 건 삶에 대한 사랑과 건강함, 바로 그것이 강한 염세주의를 낳는 것이라는 거였다는. 그니까 삶이 고통임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을 만큼 강했기에 염세주의일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이 책을 두고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염세주의를 극복했는가를 보았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여기서 니체가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발견한 것은 극복되어야 할 염세주의가 아닌 듯. 오히려 능동적으로 고통을 겪는(그야말로 suffering) 것- 아티카 비극의 주인공들로부터 그리스인들이 본 것도 그것 아닌감요.   

  • 효진 2014.10.12 20:56
    헐~ 다시 찾아봐야할듯. 난 왜 염세주의를 그렇게 이해했지. 일단 강의안이랑 책 좀 더 읽고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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