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31 15:45

8월 27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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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인간은 어떤 것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양식화, 도덕화 했는가? 푸코는 근대의 인간들이 노동과 언어, 생명이란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앎과 배치 속에서 인간을 새롭게 구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것들의 존재조건이고 진실이다. 이런 무상한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만의 실존의 미학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푸코가 스토아학파에게 이끌리는 것도 이와 연관되지 않을까. 그들은 덧없는 실존의 조건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나 비극에서처럼 필멸하는 인간과 불멸하는 신들의 세계를 대립시키는 대신 죽음을 매순간 대면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했다.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 두려움이 아닌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었는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자기 조형의 문제로 옮겨갈 수 있었는가. 유한하고 무상한 것에 조형을 가해서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존재의 기술, 자기 테크놀로지는 어떻게 발명될 수 있는가.


실존의 미학을 발명하는 데에 파르헤지아, 즉 진실 말하기는 왜 중요한가? 주체는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대상화되거나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은 어떤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자.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는 주체가 주체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고,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를 고민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진실이 주체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근대인들은 주체를 대상화시키고 자기의 앎을 행위를 분리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고대인들에게 앎과 행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행위 하는 딱 그만큼이 진실이라는 것. 우리는 자기가 구축한 진실만큼 행위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를 통해 푸코는 사물에 대한 앎의 문제가 결국 자기와의 관계를 다르게 구축해내는 문제라는 걸 가르쳐준다. 관건은 사물에 대한 지식의 양태화인데, 이는 사물의 전혀 다른 진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르게 규정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어떤 진실들로 나를 구축하고 있나? 앎을 삶의 양식으로 구축해내는 문제, 이것이 곧 철학의 문제였다.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새로운 앎을 구성하기 위한 영적 훈련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때 세네카가 망원경적 시선으로 기존의 표상들을 바라보는 훈련을 강조한다면, 아우렐리우스는 현미경적 시선을 통해 사물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훈련을 강조한다. 특히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사물을 본질 그대로 보기 위해 표상을 끊어서 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정신 속에 주어지고, 발생하고 펼쳐지는 그대로 표상의 흐름에 개입해야 한다는 이 생각은 고대의 영적 훈련과 관련된 테마에서 아주 빈번히 발견되는 생각입니다. 정신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에 의해 표상이 제공될 때, 혹은 지각에 떨어지는 모든 것에 의해 제공될 때, 인간이 영위하는 생에 의해 제공될 때, 인간의 만남과 인간이 보는 대상에 의해 제공될 때 표상의 유출을 여과하고 그것을 나타나는 바 그대로 또 주어지는 바 그대로 받아들이기, 따라서 표상의 유출을 받아들여 표상의 객관적 내용을 한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의지적 관심을 무의식적이고 무의지적인 표상의 유출에 기울이는 것, 이것은 특히 스토아주의자들에게서 아주 빈번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테마입니다.”(p.322)



문제는 표상 자체가 아니라 표상의 객관적 내용을 한정하는 의지적 관심, 즉 좋고 나쁨, 이익과 해를 분별해내는 우리의 인식적 습관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떠오르는 표상을 이전의 기억으로 총체화 시키거나 뭉개버리는 대신, 사물을 분석적·무의식적·무의지적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표상을 점검하고 분석하라! 피카소가 사물을 보듯, 사건을 다각도로 검토하라! 그렇게 보면 사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악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유용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스토아학파와 기독교가 표상분석은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인들의 표상분석은 심리적 현실 속에서의 표상분석이다. 네 마음속의 욕망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기독교. 이는 주체 안의 욕망을 분석하려는 것이지 표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로 대표되는 스토아주의자들의 분석의 핵심은 표상하는 내용의 분석에 근거”(p.330)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연을 제대로 인식하면 자기에게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구성 요소 등으로 분해해서 보면 거만한 인간도 결국 오물, 내장, , , 분비물, 비듬, 기생충 등의 결합체가 아닌가. 모든 사물들의 베일이 벗겨지면, 사물들 자체가 갖고 있는 무가치함과 하찮음을 볼 수 있고, 이로써 우리의 감각과 욕망을 포획하는 사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이런 영적 훈련을 통해 아우렐리우스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평정심이었다


고행이 전제되지 않는 깨달음은 없다. 진실의 실천은 내가 알고 있던 개념을 다르게 알기 위한 아스케시스(자기 수련)과 분리될 수 없다. 고대인들의 자기 고행은 바로 사유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법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감과 만족 속에서 살고자 했던 것. 열등감과 우월감, 아상(我相)이 부재한 존재로, 어떤 사건이 와도 그것 때문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


고행을 통해 갖추어야 하는 것은 파라스케우에(장비, 설비)이다. 어떤 사건이 와도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장비 구축. 운동선수가 모든 운동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겪을 수 있는 가능한 상황에 필요하고 충분한 기본적인 동작의 습득이 적절한 훈련과 고행을 구축해야 한다. 실존 전반에 걸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실천의 총체기 곧 파라스케우에의 문제였다.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장비의 구축. 사유 훈련은 스스로를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했다. 에토스가 되는 앎. 이를 구축하는 훈련의 방법으로는 경청, 독서와 글쓰기, 말하기 등이 있다


훈련의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승은 파르헤지아를 통해 제자들에게 진실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제자에게 요구된 정숙은 진실 말하기를 수행하기 위해 스승의 말을 정리·배열하고 자신의 상식과 억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세간의 상식이 고통의 근원이었음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스승의 파르헤지아이고, 제자들은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 진실된 말을 자기화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할 말을 이치에 맞게, 적절하게 말하는 것(=수사학의 법칙)이 중요하다. 할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첨이다. 스승은 유혹의 담론으로 제자들에게 아첨하면 안 된다. 요컨대 파르헤지아는 반-아첨이다. 파르헤지아를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자기에게 아첨하거나 비난하는 자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 진실 말하기는 어떤 진실로 나를 구축한 상태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말하기이다. 나의 진실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붓다가 한 게 바로 파르헤지아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숭배하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믿고 자기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다. 파르헤지아의 목표는 타자의 담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 그러므로 파르헤지아가 규정하는 참된 담론의 실천은 신중과 능란을 필요로 했다. 능란은 적절함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처럼 스승은 적절한 때에 제자를 깨우쳐주어야 한다. 배움에서 공동체와 우정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적절한 때는 그냥 알아지는 게 아니니까.



매순간 죽음을 직면하는 문제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에 철학은 덧없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수단이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 뿐이다. 타자에 맹목적으로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조형해내라. 앎은 기쁨과 환희가 그러하듯 고통과 환멸 또한 덧없음을 알려줄 것이다. 이런 앎을 통해 우리는 자기 포기의 길이 아닌 자기 충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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