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3 00:27

11.26 수업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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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주말에 작업 보수하다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좀 덜 아플 때 멈춰야 했는데, 알바에 작가와의 대화에 손님 접대까지... 몸을 마구 굴린 결과, 이 지경이 됐네요. 요즘 쫌 건강해졌다고 너무 방심한 결과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 마음이 타들어 갔지만 몸을 옆으로 뒤집기도 힘들어 꼬박 이틀을 누워 지냈습니다. 다행히 급성이라 치료가 잘 먹히고 있지만, 아직 장시간 앉아 있거나 걷는 건 무리네요. 아무튼, 어찌됐든, 후기 늦게 올린 점 너무너무 죄송하구요. 말이 안 되는 부분,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 너절한 부분, 가차 없이 평해주세요. 그래야 담에 쪼금이라도 더 나은 후기를 올릴 수 있으니까요.

 

니체를 읽는다는 게 뭘까요.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요? 지난 토론 시간에 참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336.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어떤 사람이 자신의 불량하고 악한 아들에게 하루 종일 너무나 괴롭힘을 당한 나머지 저녁에 아들을 때려죽인 뒤, 깊이 숨을 쉬고는 나머지 가족에게 말했다. “! 이제 우리는 편안히 잘 수 있다!” 상황이 우리를 어디로 몰아갈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이 짧은 잠언에서 아들을 죽인 자를 누군가는 아버지로 보았고, 다른 누군가는 어머니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어디에도 아들을 죽인 자가 어머니, 혹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누군가가 아들을 죽였을 뿐이죠. 어떻게 우리는 거기에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갖다 붙인 걸까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아버지가 죽였다는 쪽은 어떻게 힘없는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겠느냐. 그래서 당연히 아버지라 생각했다.’였고, 반대로 어머니가 죽였단 쪽은 아버지는 일을 하러 나간 사이 하루 종일 아들에게 시달렸을 사람은 어머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죽였다였습니다. -- 매우 사소한 논란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니체를 얼마나 많은 기존 전제와 자기 개념에 따라 읽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채운샘으로부터 니체 시작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말이 있었죠. 기존의 독서습관을 확 바꿔야 한다구요. 지난주에도 한 소리 들었습니다. 니체 시즌 1이 다 끝나 가는데 아직도 니체를 자기 이해에 맞춰 읽으려 한다고요. 다른 책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니체는 읽고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는데, 아직도 니체를 읽는 동안 자꾸 이해하려고만 듭니다. 니체의 개념으로 자기 얘기를 하면 자기강화밖에 되지 않습니다. , 정서, 충동으로 읽어서 가령 도덕이라면 그 개념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그게 달리 해석되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뭐 하나라도 변화시키기 위한 독서가 되려면 머리로 읽는 독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니체식으로 미쳐야 한다고. -- 그런데 바로 이 몸과 정서, 그리고 충동이 지금까지 30년 넘게 이해 혹은 인식하는 방식으로 독서를 해왔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바뀌긴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꾸 자각해야겠죠.

아무튼 지난 시간에는 2권의 나머지 부분부터 공부했는데요. 매 시간마다 니체의 개념이 갖는 뉘앙스를 잘 포착해야 한다는 건 이제 다들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부터 이게 잘 안되니 우리의 글 또한 자꾸 이걸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할 때도 도덕에 관해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데, 니체가 도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전제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 채 도덕이 뭐냐는 질문만 자꾸 던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채운샘께서 도덕이 취향, 혹은 충동이라고 한 니체의 말이 뭔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꾸 도덕 자체를 기만이라고 오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니체는 도덕이 없다고 , 거짓이라고 한 건가. 그럼 사회는 어떻게 되는 건가?’ 라며 엉뚱한 방향으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니체는 도덕이 기만이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취향을, 충동에서 비롯된 도덕적 감정들을 보편적인 걸로 둔갑시키려는 게 거짓이라고 합니다. 도덕 자체가 거짓이 아니라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어떤 게 진리가 된 건지를 봐야 한다는 거죠.

 

다음으로 공감에 대해 공부했는데요. 공감은 독일어로 ‘mit-leid'입니다. 공감이라고도 하고 동정이라고도 하는데요. 사실 저는 2권에서 니체가 말하는 공감, 동정을 모두 동일한 의미로 읽고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아 좀 혼란스러웠고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공감이나 동정의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지 못했던 거죠.

니체는 동정이나 공감을 단순히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니체는 타인이 겪는 사건 앞에서 일어나는 매우 다양한 행위의 충동을 하나의 언어로 말하는 게 도덕적 함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건 단순히 동정이나 이타주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죠. 거기엔 매우 복합적인 것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르다는데서 출발해야만 하죠.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각자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 마치 내가 고통을 겪을 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그때 자신이 원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동정하거나 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하는데, 이건 그저 고통에 대한 동일시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똑같은 감수성과 행위로 슬픔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우리 시대의 관습이죠. 또한 그러한 동일시된 감정은 자신이 투영된 결과라고 하는데요.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죠.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취하는 행위 또한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 욕망에 따른 겁니다. 그걸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경험한다 Mit-Lied'는 의미의 동정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니체는 함께 고통을 경험하는 건 결국 자기를 위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간파합니다. 그건 고통을 겪는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고 나 또한 그 고통 앞에서 관습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잠시잠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와 감정적으로 동일시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죠.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선 타인이 겪는 사건,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나와 타자는 고통을 체감하는 정도, 그걸 느끼고 경험하는 방식 등 모두 다릅니다. 그건 동정이란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니체는 그러한 다름을 다음(多音)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다음적 존재가 겪는 고통은 저마다 다 다를 텐데, 어떻게 하나의 언어, 하나의 도덕으로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때문에 니체는 고통에 대해 동일시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고통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힘으로 고양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똑같이 슬퍼하고 동정하는 건 서로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오히려 고통과 슬픔만 배가시킬 뿐이죠. 동정의 진짜 함정은 우리가 약자로서 모든 힘을 동일시하는 그 일체감에 있다고 하죠. 그러니 그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에 동일시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나 혹은 타인이 어떤 고양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붓다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도 이와 비슷하죠. 부처님이 어떤 인간의 생로병사와 마주해도 거기에 감정이입해서 그 고통을 동일시하지 않고서도 이를 자기 문제화 했습니다. 생로병사, 애별리고의 로부터 시작된 문제의식이 무상, 무아를 깨닫는 데까지 이르게 했던 거죠.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건 결국 그 문제가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입니다. 고통을 민감하게 감수하는 자라야 오히려 초연해질 수 있다고 하죠. 그 고통의 다름을 인식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자야말로 자신의 고통에도 초연해질 수 있구요. ‘자기에게 잔인한 자만이 타인에게도 잔인할 수 있다.’ 이게 이타주의 넘어선 니체의 도덕이라고 합니다.

니체는 동정의 메카니즘에서 뭘 얘기하려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 지배하는 충동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떤 충동이 지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한 가지 단어만의 감수성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134.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동정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저는 니체가 동정을 경계하라는 것이 그걸 나쁜 것이니 물리쳐야 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충동이나 동정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게 아니죠. 동정도 일종의 충동이며,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도움이 타인의 고통과 동일시된 상태에서 이뤄지면 안 됩니다. 타인도 나도 고통 속에서 함께 병들고 우울해질 것이 아니라 그걸 각자 자신을 고양시키는 힘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니체는 고통 앞에서 고양되는 예를 그리스 비극에서 보았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경멸할 말한 인간들이 아니죠. 하나같이 고귀한 인간들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온갖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고양됩니다. 고귀한 인간들이 멋진 방식으로 자기 고통을 넘어갈 때 기쁨을 느끼게 되는 거죠. 이처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더라도 그때 자신이 어떻게 고양될 것인가의 문제가 니체에게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동정이나 공감이란 말도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동일시된다면 우리 삶에 고통만 배가시킬 뿐이지만, 그게 타인과 나를 고양시키는 것이 된다면 오히려 살아갈 힘이 됩니다.

146. ‘이웃도 넘어서는 니체가 넘어가는 동정론의 결론입니다. 니체는 타인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이러한 결과를 무시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좀 더 먼 목표를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내겐 한층 더 높고 한층 더 자유로운 관점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 통해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죠. 마치 부처님이 타인의 생로병사의 문제를 통해서 결국 자기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웃을 넘어 가라는 건 결국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 자아를 넘어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공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다르게 공감하라는 것.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와 이웃 사이의 경계를 없애 이웃에게도 자기에게 하듯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

니체의 도덕은 측정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덕은 자기충동의 문제니까요. 사실 이게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도덕이 자기충동의 문제라는 게 잘 그려지지 않아서요. 게다가 니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덕. 이것은 급격하게 용솟음치는 감정의 도덕이고 극히 변덕스러운 도덕이며, 격정적이고 치열하며 끔찍하고 장엄한 태도와 음조의 도덕이다.’라고 합니다. 이게 어떤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도덕이라는 것 앞에 그림처럼 아름다운이라느니, ‘감정이라느니 하는 걸 연결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잖아요. 니체는 이러한 도덕을 도덕의 야만적인 단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해야 할 것은 이러한 단계의 도덕이 고대의 도덕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는 거죠. 니체는 늘 아직 오지 않는 것’, 도래하는 것‘, ‘먼 곳으로서의 도덕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도덕이란 늘 문명이나 관습으로 굳어진 것들을 깨고 가야 하는 도덕이란 걸까요? 강의를 들으며 이 너무 낯선 말들, 아니 낯선 언어의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단은 니체의 이 낯선 개념들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도덕이라 하고,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동정하는지를 살펴봐야겠죠. 토론하면서 느꼈던 건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다 보면 니체의 개념 또한 우리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3권으로 넘어가야겠네요. 3권은 잠언들을 몇 개씩 묶어서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우선 171-202-203는 니체 철학의 생리학적 관점에 관한 글들입니다. 니체는 근대인들을 모든 것을 먹는 인간이라고 하죠. 이 잡십성 인간들은 소화시키지도 못하는 것들을 무작정 먹어치우기만 하는, 니체는 세련된 종이 아니라 했지만, 실은 천박한 종에 불과합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신분도 없고 오직 돈만 대표할 뿐이죠. 오직 돈만이 힘이고 명성이고 존엄이고 우위이며 영향력이 되어버린 시대의 개인. 니체는 이 처럼 건강, 생리학, 병리학 등에 비추어서 근대를 그리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병적 징후들을 포착해 냅니다.

토론하는 동안 (특히 덕순양이) 니체가 하는 범죄에 관한 부분들을 참 못 견뎌 했었는데요. 202.에서 죄라는 개념을 이 세계에서 치워버리자!’라는 말들을 듣고 바로 나오는 반응. ‘그럼 연쇄살인범이나 아동 범죄자들은요?’ 이런 거죠. -- 늘 우리는 범죄나 그에 따른 벌을 극한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경우에 빗대어 필요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니체는 범죄자를 선악의 가치에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병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느 시대의 죄, 혹은 범죄란 것은 그 시대의 병적인 징후를 보여주는 거죠. 범죄자는 전혀 다른 감수성과 윤리감각을 지닌 강한 자이거나, 사회의 병적 징후 고스란히 앓고 있는 병자입니다. 그러니까 범죄자도 다 같은 범죄자가 아닌 거죠. 가령 대한민국 남자들은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 그런데 그 군대도 자기 신념에 따라 가지 않고 기꺼이 징역살이를 택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있죠. 이들은 니체가 말한 범죄자 유형에서 전자에 가까운 사람들일 것 같습니다. 시대적 가치와 윤리에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반면 우리 시대의 가장 두려운 존재, 사이코패스나 소시오 패스는 단순히 우리 시대가 낳은 괴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니체 식대로라면 그들은 오히려 약자입니다. 우리 시대의 주된 병, 즉 타인과의 공감이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자들이잖아요. 이들이야말로 아픈 자들이고 병자들인거죠. 이러한 아픔이 죄로 만들어진 건 기독교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모든 가치를 선악으로 환원해 평가하는 기독교적 가치로 인해 우리는 범죄의 문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173, 174. 니체가 노동과 개인을 얘기하는 방식도 매우 놀라웠습니다. 니체는 사림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그것들에서 공익을 위한 비개인적인 행위들에서와 같은 저의, 즉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고 했습니다. 고대의 집단화는 독특한 신분의 집단이었다죠. 자기 고유함을 잃지 않고, 개인적인 것 없애지 않아도 가능했던 귀족 집단. 하지만 니체는 자기 시대의 개인이 집단화 되는 것은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제거해 집단으로 만드는 걸로 봅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개인들은 각자의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힘쓸 여력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저 작은 목표를 위한 노동에 길들여질 뿐이죠. 때문에 니체는 이러한 사회는 더욱 안전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정말 요즘 시대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요. 과도한 노동시간 앞에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저항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드라마 한편 보며 자신들의 고된 일상을 힐링하는데 시간을 보낼 뿐. 자신들의 가치나 일상적인 무엇이 깨지는 게 너무도 두려워 범죄나 일탈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구요. 노동으로 점차 동일화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공할 일이다. ‘노동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이다! ‘위험한 개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위험 중의 위험, 즉 개인이 있다.’고요. 이 마지막 말 때문에 지지난주 토론 시간에도 논란이 상당했는데요. ‘노동자가 위험하다는 것이냐, 아니냐.’ 혹은 그들이 모래알 같은 집단화 되어 더 이상 스스로 성찰할 줄 모르는 그들 자신의 인생이 위험해진 것이냐.’ 등 여러 의견들이 오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채운샘께서 세계에 무언가 만들어지면, 이게 어떤 방식의 힘으로 전환될 것인가를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집단으로 만들어진 노동자가 과연 집단화 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여기엔 집단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174번에서 사회를 끌어가는 건 공포심의 전제적인 지배라고 나오죠. 우리의 윤리법칙은 공포심의 조장에 의해 정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에서 고된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성찰, 고민, 몽상 등에 힘쓰지 못한 것과 같죠.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곤경과 괴로움을 살쾡이처럼주시합니다. 그걸 통해 자신도 그와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좀 더 안전한 위치에 선 것에 대해 우월감에 사로잡히죠. 그런데 여기 어디에도 자기의 기쁨은 없습니다. 또한 타인이 우리를 보고 즐거워할 수도 없구요.

니체는 새로운 도덕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타인을 돕는 도덕, 가령 앞에서 살펴봤던 고통과 슬픔으로 동일화된 동정이나 공감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도덕을 얘기합니다. 이 기쁨의 도덕을 보고 잡아함경에서 매 경전 말미에 등장하는 말이 떠올랐는데요. 제자나 방문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보인 동일한 반응이 있죠.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예배하고 떠나갔다입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고민 혹은 고통을 부처님께 털어놓습니다. 그럼 부처님께서 이를 해결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한다는데, 이 기쁨은 물론 감정적인 기쁨은 아닙니다. 자신의 고민이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로 인해 괴로워했던 자들이 스스로 고양되는 자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결국 부처님의 한 말씀에 의해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이 단박에 사라진데서 오는 기쁨인 거죠. 그리고 그 깨달음 또한 그들의 것이구요. 부처님으로 인해 스스로 고양된 자들. 양쪽 다 잘 해석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니체가 타인이 나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도덕이란 걸 언급했을 때 전 경전의 구절이 생각나더라구요.

니체의 말투가 참 세서 가끔 오해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인류가 모래알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 ‘그럼 날카롭고 모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걸까라고 오해를 하게 되는데요. 그것보다 니체는 수치심, 혹은 공포심에 의해서밖에 윤리법칙을 사유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고 합니다. 도덕적 감정들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창안해야 하는 거죠.

 

179-189-206. 새로운 정치에 대한 니체의 생각 엿볼 수 있는 잠언들입니다.

모든 정치, 경제적인 일들은 보다 열등한 두뇌의 소유자들을 위한 노동 영역이라는 니체의 글을 읽고 빵 터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티브이나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정치, 경제적인 일들에 매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은 정말 열등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맞나 봅니다. 그런데 그 열등한 일을 하지 못해 하루하루 전전긍긍해 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니. 니체는 존재하는 최고의 수단과 도구를 통해 이러한 목표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수단과 도구는 가장 높고 가장 드문 목적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높고 가장 드문 목적이란 자기 깨달음, 자기 자유입니다.

니체는 군주나 권력자들뿐 아니라 민중들을 추동하는 힘의 감정에 대한 욕구를 얘기합니다. 저는 이 힘의 감정이란 것을 단순히 권력자만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혁명에 의해 민중이 지니는, 승리한 어느 한 쪽이 지니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토론하며 알게 되었습니다.(역시 니체는 혼자 읽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이 아닌 힘의 감정이라고 했을까요. ‘이라는 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힘의 감정에서의 변이될 때 이행의 느낌이라고 합니다. 사건 속에서 이행되고 그때 고양되는 것이죠.

니체의 이러한 힘의 감정은 스피노자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하죠. 스피노자도 능동, 수동, 부정 등에 관해 언급합니다. 스피노자는 특히 정서를 매우 중요시하며, 존재론적으로 중요시 되는 건 존재에게 일어난 변이들, 혹은 차이들이라고 합니다. 차이는 결과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행되는 것인데, 이게 affect, ‘힘의 감정이죠. 우리는 존재가 결과적인 것만 경험한다고 느끼는데, 존재는 이행되는 것이라 합니다. 패배와 승리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로 가기까지 힘이 어떤 방식으로 체험되느냐만 있는 거죠. 니체는 이걸 나중에 의지로 정립한다는데요. 이건 인식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답니다.

채운샘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습관적 독서방식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책을 읽을 때 이해보다 먼저 소용돌이치는 것이 있답니다. 이게 실존이구요. 책을 읽을 때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느낌의 차원에서, 무의식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까지 봐야 한다는 거죠. 인식의 반대편에는 사태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장 속에서 벌어지는, 주체에게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힘이 있답니다. 그게 바로 감정, 느낌입니다. 책을 읽을 때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과 느낌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니체를 읽으며 생긴 새로운 힘의 분출. 이것이 나 자신에게 이행되는 실제적 힘의 변이가 되도록 하는 것. 말이 참 어려운데요, 니체 읽을 때 이해하지 말고 각자에게서 무엇이 소용돌이치는 지를 보라는 것. 니체를 읽으며 자꾸 상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힘의 감정에는 강자의 힘약자의 힘이 있는데요. 니체는 인간은 힘의 감정을 가질 때, 자신이 선하다고 느끼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자신의 힘을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인 타인들은 그를 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선하다고 느끼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에 의해 고양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강자인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힘을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인 타인들, 즉 자기가 갖지 않은 힘을 가진 누군가의 힘에 대해 반작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들은 약자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악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건 다른 이의 힘에 대한 질투와 시기 등의 악한 힘의 감정에 의해서인 거죠. 이 약한 자들의 분노가 아무리 강해도 이는 오직 타인에 의한 것이기에 약한 힘일 뿐입니다. 니체에게 대립은 오직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립뿐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도 아니고, 제도나 사회를 바꾸는 혁명도 믿지 않았답니다. 오직 우리 시대의 힘의 욕망을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힘의 욕망, 그리고 지금 우리를 추동하는 힘의 욕망이 무엇에 의해 발현되느냐는 게 중요한 거죠.

힘으로 고양되는 경험은 자기가 자기로 남아있지 않은 경험이라고 합니다. 가령 자기에게 익숙한 것 넘어서려면 이게 아니면 안 되는 경지까지 가봐야 한다고요. 자기가 두려워하는 지점을 확 넘어가봐야 한답니다. 자기 한계보다 열 배는 더 해야 한다고요. 그럼 미칠지도 모른다는데, 그래야 니체를 읽었다 할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3권의 하이라이트206. 토론할 때도 이 잠언을 가지고 참 많은 말들이 오갔는데요. 특히 니체의 이민때문입니다. 수업 듣고서 좀 어이없는 맥락에서 얘기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니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민가라고 말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생산하고 그를 통해 최대한 부유해지기 위해 우리는 인격을 버리고 기계의 나사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까요. 이러한 우리에게 니체는 오히려 그대들이 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면적인 가치가 그러한 외면적인 목표를 위해 포기되는지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니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되라고 하죠.(참고로 이 고민은 문정이의 공통과제를 통해 끊임없이 상기되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에게 빗대어 말하자면 돈, 명예, 직장, ..... 사회에서 통용되는 외면적인 가치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무엇에 지배되고 있는지, 우리를 추동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소로도 비슷한 말을 했다는데, 전 아직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은영언니와 함께 하는 이브의 밥상에서 곧 읽게 되지 않을까 몹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야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니체의 이 말이 단순히 기계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니체는 묻습니다. ‘그대들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조금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대들이 김빠진 술과 같은 그대들 자신에 진저리가 난다면?...이에 반해 정신 나간 희망으로 그대들을 선동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적인 쥐 잡는 인간들의 피리 소리가 항상 그대들의 귀에 들린다고 하면? 그들은 그대들에게 준비만 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늘도 내일도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대들은 외부에서 무언가가 올 것을 기다리고 기다릴 뿐, 그 밖의 모든 점에서는 예전대로 산다.’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스템으로부터 도망치더라도 그것에 포박되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외적 가치에 휘둘리며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위험한 개인들’, 집단화 된 개인들에 대해 니체가 다소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외부에서 무엇이 오더라도 우리의 삶은 그저 예전과 같은 거죠.

때문에 니체는 차라리 이민을 가자고 합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자기 영토로부터의 탈주라고 하는데요. 니체에게 자기 영토는 유럽, 유럽의 미덕, 유럽적인 가치 등이었습니다. 혹은 자기 시대의 독일적인 것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니체는 이런 것들로부터 떠나 이민을 가야만 기존 문명에서 고수되었던 가치들이 깨진다고 봅니다. 가령 니체가 언급했던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덕도 관습적인 도덕 가치로부터 떠나야 가능한 것이죠.

 

읽을수록 어렵지만, 더 알고 싶은 니체입니다. 니체 읽는 내내 왜 잘 안 읽히고, 왜 잘 안 써지는지, 자꾸 제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는데요. 채운샘께서 하신 말씀. 열배는 더 열심히 해야 읽힐 수 있다고. 니체처럼 미쳐야 한다고. 이틀 간 자리에 누워 한 생각은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겠구나.’였습니다

  • 채운 2014.12.03 00:30

    읽으라는 고야 말라는 고야.... 이노무 과잉병! 넌 이 병을 고치는 날 몸도 나으리라고 본다.

  • 효진 2014.12.03 15:05
    넵. 허리두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해치우다 이리됐죠. ㅡㅡ. 참 저두 읽기 힘든 걸...올려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일단 올렸네요. 담엔 후기는 무조건 3장 이하로 하겠슴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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