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첫 번째 시간에 도덕의 '수치스러운' 기원에 대해 알아본 데 이어, 지난 시간(어제였죠^^) 수업에서는 2권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들 개개인이 느끼는 도덕 감정들(동정, 이기주의, 이타주의...)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저로선 크게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어요.
하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을 선의 원리로 상정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과 창작된 원칙이 옳다고 믿고, 이 원칙이 타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이랍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기독교도 상인 안토니오와 그 친구들이 유대인 샤일록을 대하는 방식이 딱 이래요.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니 내가 너의 잘못을 일깨워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 하여 그만 샤일록을 강제개종시켜버리는 퐝당한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니체처럼 이를 순전히 힘 관계로 파악했을 때, 우리는 그 순간 안토니오의 마음을 물들인 것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다름 아니라 상대에게 힘을 행사함으로써 느끼는 강한 우월감(쾌감)인 거죠! 도덕은 개뿔~ 실상 안토니오가 주창하는 원칙과 도덕이란 것도 하나의 감정과 느낌의 문제인 거지 '원래' 있던 불변의 명령이나 원리원칙이 아니라는 겁니다. 안토니오 및 선한 기독교도 그룹이 믿는 것과 달리 도덕이란 기실 힘의 문제이며 기원은 감정 차원에 있는 것, 하여 우리는 이를 심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아무튼 이렇게 도덕을 떠받들고 복종하는 베니스의 상인들, 자신을 선의 담지자로 내세우는 우리들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란 결국 동정하기라네요. 샤일록에게 행한 폭력 또한 그에 대한 기독교적 연민과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동정심의 발로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인가? 여기서 기막힌 설명이 등장합니다. 정말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라면 절대 동정하지 않고 차라리 잔인하게 굴 거랍니다. 그는 상대방이 어떤 문턱에 걸려 넘어졌을 때 절대 손수 일으켜주지 않습니다. 네 눈으로 그 자리를 보고, 네 힘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한다지요. 왜냐하면 상대방이든 나든,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강해져야만 한답니다. 이를 회피하는 방식이 곧 타인에 대한 동정이 되지요. 그러니까 동정은 결코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인한 책임 방기이며, 따라서 비겁한 행위라는 거죠. 삶에서 만난 어떤 거대한 사건 앞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내기 위해 인간은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그는 계속 묻죠. 그때 그 일은 내게 무슨 의미인 걸까, 그때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걸 묻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서가 아니어도 우리는 대개 그러기 마련이죠. 그러면서 타인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띡- 돈을 보태주거나 함께 술을 마신 뒤 울어주거나 할 뿐이라는 거예요. 세월호 사태에서 느닷없이 터진 모금 운동 붐이 그 예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일단 나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후련하죠, 내 힘을 조금도 들지 않은 채로 말이죠. 이게 바로 니체가 완전 혐오하는 동정! 게으르고 나약하고 그러면서도 쾌감을 얻고 싶어하는 자들이 하는 뻔뻔한 짓! ...동정하지 않고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은 각자 발명해내야 한다는 게 물론 거대한 난제입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나' 혹은 '인간'이라는 신화에 대한 니체의 반박이었어요.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의지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해왔다, 내 자아의 고유함이 있다... 니체는 이 모든 말들을 발로 뻥 걷어찬 뒤 이렇게 말합니다. '주체' 혹은 '자아'란 그저 일련의 행위들의 결과물일 따름이다! ..."내가 했다"고 믿는 우리와 달리 니체는 "행해짐으로써 내가 나온다"고 말하는 셈인 거죠. 편의점에 가서 코카콜라를 고른 뒤 계산을 치르고 나왔다고 칩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콜라를 마시기로 결정하고 콜라를 구입했다고 여깁니다만, 니체라면 아침에 본 코카콜라 광고와 현재 내 몸속의 혈류 속도나 콩팥의 기능, 마침 길가에서 발견된 편의점, 평소 인스턴트를 즐기는 식습관 등등이 우연하게 접속함으로 나로 하여금 바로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콜라를 고르게끔 했다고 보겠죠. 만약 콜라를 마시러 갔다가 미네랄 워터를 골랐다면 그것은 내가 의지를 사용해 콜라의 유혹을 이겨낸 게 아니라 미네랄 워터를 마시고픈 그 순간의 충동이 더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네요. 이성적으로 판단해 몸에 덜 나쁜 것을 먹기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날씬하게 보이고 싶은 충동이 더 컸으리라는 것 ㅋ
자, 이렇게 말하는 니체에게 있어 인간이란 결코 의지의 담지자,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충동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철저히 동물적이지요. 그런데도 사법이나 종교에서는 언제나 '죄'의 '의도'를 물어대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보여준 것처럼 의도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실은 모든 게 다 범행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일어난 뒤에 이를 물어봤자 그가 내놓는 답은 모조리 사후적 창작일 뿐. 그렇기에 이 파격적인 주인공은 차라리 '일은 벌어졌다, 자,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거죠. 다시 니체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러저러한 것이 인간이다'라고 우리는 믿고 싶어합니다만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아무 쓸 데도 없는 환영에 불과합니다. 그런 인간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개개인은 그 같은 보편적 인간형에서 항시 넘쳐나는 힘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요. 인간은 의지로 제 힘을 가두고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충동과 다양한 정서들과 힘으로 짜인 직조물과도 같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사후적으로 판단한 뒤 날조하는 거죠. 이런 게 인간이고, 이게 우리의 도덕이고, 하여 무릇 인간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하고...
니체처럼 문제는 오직 힘!이라고 하는 순간 모든 도덕 원칙이 다 무화되고 말겠죠. 그의 말마따나 그때그때 내 힘의 고양만이 문제일 따름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죄나 가책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조금도 없게 되니까요. 하지만 니체가 도덕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차라리 여기서 문제는 다른 방식의 도덕을 창안하는 것! 기존처럼 원칙에 의한 명령과 그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아니라, 로마인처럼 각자 발명한 자기만의 윤리가 요청되는 것이라는 사실.
자, 그러므로 남겨진 실질적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도덕률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윤리를 창안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 ㅋㅋ
으흠. 빠르고 응용적인 후기 좋아. "니체와 함께 소설을", 요런 거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