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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니체의 철학>

 

  본격적인 아침놀에 들어가기 전, 들뢰즈의 <니체의 철학> 중 몇 가지를 간략하게 짚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니체의 가면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에게는 모든 것이 가면이라고 말합니다. 가면은 여러 자아들이 현시되는 방식입니다. 니체는 하나의 자아의 통일성을 믿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파울 레조차도 그 자신의 고유한 가면으로 체험했다고 합니다. 니체에게 항상 새로운 것은 이전시대의 가면을 쓰고 그 아래 새로운 힘들을 갖고 등장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자아들 사이에서의 힘과 가치평가의 미묘한 관계들, 이전의 것들을 자기화 하고 변주하는 것이 바로 니체의 생각이며 그의 삶의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해석과 가치평가입니다. 니체는 인식이라는 이상과 참된 것의 발견이라는 목적을 해석과 가치평가로 대체합니다. 해석은 어떤 현상의 항상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의미를 정하고, 가치평가는 여러 의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의 관계를 정합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잠언이 해석하는 기법, 즉 니체가 해석하고 있는 의미의 파편들인 동시에 우리로서 해석되어야하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니체의 철학은 그렇기 때문에 복수(복수주의pluralisme)의 철학입니다. 이는 다양화 하는 힘, 다시 말해 다양한 해석입니다. 들뢰즈가 니체의 철학을 아름답게 느낀 이유도 그것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세 번째는 철학을 하나의 힘으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위에도 언급했듯 힘들의 법칙은 미리 존재하는 힘들의 마스크로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힘은 그것이 그리스에서 나타났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변장해야만 했습니다. 들뢰즈는 그러한 마스크 아래 숨겨져 있는 특유의 고독과 감성, 위험한 실존의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목적들을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은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비슷한 것을 말하는 듯해도 우리는 그 뉘앙스를 잡아서 읽어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니체가 말하는 가치들의 전환입니다. 니체의 저작은 다수의 글에서 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신의 살해자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추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짐을 자발적으로 짊어질 때, 인간은 자신을 훨씬 더 추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사는 인간의 오랜 복종의 역사이며, 그러한 복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이유들의 역사입니다. 들뢰즈는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철학은 항상 반시대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반시대적임은 단순히 그 시대와의 대결만이 아닌, 그 시대가 자기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과거와 그 정당화 하는 것과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아침놀 1

 

  니체의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의 글을 읽는 방법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의 주제를 갖고 읽어내는 것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이번시간에는 1권을 <도덕의 기원>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선생님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니체는 수치스러운 기원을 자주 말합니다. 우리는 도덕이 고상한 기원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하잘 것 없는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를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나중에 덧붙여진 이성. 오랫동안 존속하는 모든 사물은 점차 이성에 의해 침윤되기 때문에 그것이 원래는 비이성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판단(이성)에 의해 충동들은 변형됩니다. 충동에는 좋은 것, 나쁜 것이 없습니다. 충동 자체에는, 모든 충동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도덕적 성질도 없으며 더욱이 그것에 수반되는 쾌·불쾌라는 특정한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분별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충동을 규정하면 선과 악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2의 본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은 우리와는 다르게 느꼈습니다.’ 판단 이전에 그것이 갖는 기분에 대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신들이 시기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도 쾌·불쾌의 감정 없이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희망을 맹목적이고 악성적인 것으로 느꼈습니다. 근대인들이 희망을 품는 것에 만족하는 무수한 경우에도 그들은 미래를 탐문하는 것신탁을 종교적인 의무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우리와는 달리 마냥 나쁜 것만이 아닌 신성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근대인들에게 이는 낯선 것입니다. 어떤 판단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보게 만듭니다. 라파엘로는 어쩔 줄 모르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혼란스럽게 꿈꾸는 사람들, 이 세상을 초월한 환희에 잠긴 사람들로 인간을 구분하지만 근대인들은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풍습은 관습적인 행위 방식이며 평가 방식입니다. 관습이 규제하지 않는 것들에는 윤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습이란 단순히 그것이 명령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 좀 더 높은 권위입니다. 관습에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관습에 좀 더 높은 명령하는 지성과 이해할 수 없는 불명료한 힘, 그리고 개인적인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풍습의 윤리는 개인에게 자신을 희생할 것을 명령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풍습의 윤리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는 풍습을 해치는 것에 대한 벌이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에 내려진다는 생각 역시 지배합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죄를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의 죄로 느끼고 개인의 벌을 자신의 벌로서 떠맡습니다.

  공동체에서 일체의 개인적인 행위나 개인적인 사고방식은 모두 전율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모든 점에서 관습이 아니라 자신에 의존하고자 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입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비범하고 특별한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은 역사의 전 과정에서 항상 악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상에게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면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입니다. 광기는 고양된 힘의 감정입니다. 힘의 지표입니다. 광인은 시대의 징후를 막 떠들어대는 확성기입니다. 그들은 일상의 언어를 거부하고 관습을 거부합니다. 니체는 이들이 그야말로 모든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인간들이라고 합니다. 관습이 복종을 강요하는 시대에 그들은 가장 쓰라리면서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시체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초기 공동체의 가장 최고의 향락은 잔혹함의 향락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잔인한 사람의 행위를 통해 공동체는 활기를 되찾고 끊임없는 불안과 조심에 수반되는 음울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더불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됩니다. 예컨대 원시적인 성인식통과의례는 잔혹합니다. 이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탐구하고 신적인 비전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가장 윤리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은 자주 고통을 겪는 것, 궁핍, 혹독한 생활 방식, 잔혹한 고행이라는 덕들을 그 속성으로 포함하게 됩니다. 풍습들의 저 활기 없고 진득거리는 진창 속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광기 이외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고문입니다. 즉 지금 우리의 긍지를 형성하는 약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보다 더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은 없습니다. 인류의 성격을 확립한 진정하고 결정적인 주요 역사는 근대적 보편사인 세계사에 선행합니다. 세계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풍습의 윤리가 지배했던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것이 어떤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가치 평가되는지 주목해야합니다. 이 주요 역사에서 괴로워하는 것과 잔혹과 위장과 복수와 이성의 부인은 덕으로 간주되었던 반면, 만족과 지식욕과 평화와 동정은 위험으로, 동정을 받는 것은 모욕으로, 노동 역시 모욕으로, 광기는 신성으로, 풍습의 변경은 비윤리적이고 파멸을 잉태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니체는 전도된 평가 때문에 발전되어 왔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꼬집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차별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동물과 닮아있습니다. 모든 도덕적 현상은 가장 동물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 도덕은 추적자들한테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며,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해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보호색처럼 개인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보편성이나 사회 밑에 자신을 숨기고 군주, 신분, 당파, 시대, 환경의 의견에 순응합니다. 인간의 진리에 대한 감각은 근본적으로 두루뭉술하게 파악됩니다. 이는 동물의 감각 이상이 아닙니다. 현명함, 절제, 용기의 기원처럼 정의의 기원 역시 동물적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극히 동물적이지만 자신을 특권적인 존재로 미화합니다. 기만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결혼제도입니다. 사랑에는 결혼을 통해 보다 높은 고귀함이 부여됩니다. 정열의 본질을 거슬러서 정열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과 정열을 지속해야 한다는 책임을 인정하는 모든 제도들은 정열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일회적인 것에서 영원한 의무를 창출해낸 것이 제도들과 풍습들입니다. 이런 개조를 통해 극히 많은 위선과 거짓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대가로 새로운 인간을 고양하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고대인 중에는 자신의 덕을 연기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자신의 덕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보다도 특히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습에서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매번 다르게 구현되는 자신의 탁월함을 어떻게 행위로 드러낼것인지를 고민한 것입니다.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줄 방도도 없는 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덕은 잔혹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월의 도덕이 근본적으로 세련된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도 역설적이고 거의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사실입니다. 덕을 과시함으로써의 잔혹함은 우리 시대에 잊혀 졌기 때문입니다. 감정만 유전될 뿐 생각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인들은 덕이 내면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잔혹으로 맺었던 관계가 없어지고 이제 습관 자체에 대해서만 쾌감이 존재합니다. 도덕적인 우월감은 괴로움을 통해 그 이외의 다른 세계보다 더욱 깊은 진리의 세계를 긍정하게 된다고 생각하며 자위합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괴로워하기를 바라며 자신이 현실을 초월해 숭고해졌다고 느끼기를 원합니다.

  고대의 덕의 배우들을 저지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대신 죄의 역겨운 과시와 전시를 했고 이로써 기만적인 죄책감이 탄생했습니다. 불행과 죄기독교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저울위에 놓았습니다. 불행은 죄의 값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을 불행이라 판단하고 이 불행은 때문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죄와 불행 사이에 아무런 상응 관계를 설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영웅이 겪는 불행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불행이거나 극도의 오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벌이 되며, 받아 마땅한 벌이 됩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느끼고 자신을 저주받은 것으로 느낍니다. 인생을 저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염세주의입니다.

  기독교의 매커니즘은 모든 사람에게 죄를 심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도 죄가 있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 <신약 성서>에는 덕의 규준, 즉 완성된 율법의 규준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규준은 실행이 불가능합니다. 윤리적으로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인간들은 이런 규준에 비추어 보면서 자신들이 자신들의 목표에서 갈수록 멀어진다고 느껴야합니다. 그들은 덕에 대해 절망해야 하고 결국 자비로운 사람의 가슴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의심만 품어도 그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사람들은 이성을 버리고 기적을 통해 신앙 속으로 내던져져야 합니다. 기적, 즉 갑작스러운 전환은 신을 설명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늘 기적을 동반합니다. 자연스러움의 일부인 현상이 기적으로 교묘히 바뀝니다. 기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기독교 교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관상적인 신성한 삶이 그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자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믿음을 사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성경의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민중의 언어로 성경을 직접 읽도록 그리하여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회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루터는 또 다른 자신의 교회를 세우는데 그칩니다.

  최초의 기독교인은 바울로입니다. 유대교 신자였던 바울로는 신과 그의 율법의 광신적인 수호자이자 명예의 파수꾼이었습니다. 율법을 위반하고 의심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키려들수록 그의 내면의 과도한 지배욕이 율법을 위반하도록 끊임없이 그를 자극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극단적일 정도로 광신적인 율법 숭배와 율법 옹호를 통해 자신의 양심과 나아가 지배욕을 다시 달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루터처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과 함께 그를 구원하는 사상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이용해 율법을 파괴한 것입니다.

  율법을 제거하기위해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필요했습니다. 바울로는 저항할 수 없는 마력으로 율법을 위반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육체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는 육체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 이것은 율법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이 파괴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 이것은 율법 역시 사멸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독교가 죽음, 부활, 심판에 집착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구원은 육체를 가진 지상에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신의 구원으로 전회conversion 하였습니다. 죽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은 죽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죄 많은 육신은 죽어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살아있었을 때 했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복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죽음을 통한 구원만이 남았습니다. 지상의 삶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지옥의 형벌이라는 생각을 발견합니다.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 루크레티우스가 지하의 공포에 대한 신앙을 가까스로 없애는데 노력했지만 기독교는 이 신앙을 특별히 보호했습니다. 죄인들의 대한 형벌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는 것, 그리고 결코 다시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위협. 기독교는 이렇게 지배의 매커니즘을 구축합니다. 바울로는 죽음 이후는 영원하며 그 영생의 문은 열리기 시작하고 있으며, 결국 이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도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옥이라는 부가물은 선교사들에게 아주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니체는 종교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획득합니다. 독자적인 위대한 가설을 갖게 되면서 느끼는 환희가 벅찰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는 감히 그러한 환희의 창조자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겸허를 가장한 극도의 오만을 가진 그는 그것의 원인과 나아가 새로운 사상의 원인을 신의 계시로 여겨 신에게 돌립니다. 계시이기 때문에 가설의 성격도 제거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회의마저 허용되지 않습니다.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도구로 끌어내리지만 결국 신의 사상으로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더불어 승리자라는 느낌이 비하의 느낌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신이 나를 선택해주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 짧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종교는 위대한 계시가 내려져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 불고 하늘이 우르릉 쾅쾅 난리 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누군가의 개인 생각이라는 얘기입니다. 정말 대단한 니체입니다.


  • 수경 2014.11.15 11:34

    빠른 후기 멋지네욥!!!>.<  숨가쁘게 이어지는 정리 끝에 "정말 대단한 니체입니다"... 저 이 어조가 왜케 웃길까요ㅋㅋ 암튼 지난 주에 1권 읽으며 바울로 이야기 영 모르겠어서 답답했던지라 이번에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부분. 기독교 비롯 서구 철학의 베이스가 너무 없어 스스로 갑갑합니다그려. 

  • 윤차장 2014.11.16 08:14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은 사람...너무 멋있어서 힘드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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