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시간>
지난 토론 시간에는 <차라투스트라> 서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책의 맨 앞 장에는 “모두를 위한, 그리고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 적혀 있는데요, 이런 시적인 표현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저희들이 관심을 갖고 얘기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 간략히 적어보겠습니다.
1. 토론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외줄을 타는 어릿광대의 이야기입니다. ‘외줄타기’는 무엇이고 ‘어릿광대’와 그를 뛰어 넘은 ‘사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를 연결하는 밧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어릿광대는 위험을 감수하고 위버멘쉬를 향해 가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사내’ 때문에 밧줄에서 떨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몰락’의 이미지일까요, 아니면 위버멘쉬를 향해 간다는 것이 죽을 만큼 위험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어릿광대를 몰락시킨 ‘사내’,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그는 대체 누구? 사회적 통념, 도덕, 이성, 정의와 같이 위버멘쉬가 되기를 방해하는 위험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2. 드디어 ‘위버멘쉬’가 등장합니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제시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유형입니다. ‘위버멘쉬’라는 하나의 상(像)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위버멘쉬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버멘쉬로 가는 밧줄을 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귀 기울여 보시길.
3.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윤차장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빈약한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음을 고백하셨는데(매주 고백의 연속~) 우리는 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 대답이나 생각의 결과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4. 동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책 서문에 등장한 동물은 뱀과 독수리입니다. 뱀은 영리함을, 독수리는 긍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뱀과 독수리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라는데, 왜 그들이 함께 등장한 것일까요? 차라투스트라에게 길동무는 왜 사람이 아니라 동물인지, 그들에게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차라투스트라>에 담긴 비유와 상징, 패러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비유와 상징, 패러디를 만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수업 시간>
수업 시간에는 <즐거운 학문> 5장 마무리와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즐거운 학문>에서의 ‘자연적 인간과 힘에의 의지’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구성체들 간의 힘과 힘의 싸움의 장이며, 생존이 아니라 힘의 확장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비하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인간도 환경의 일부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이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생산하는 것, 다른 생물체들을 착취하면서 나타나는 환경문제들이나 그러한 인간 욕망에 문제를 제기하는 환경운동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앞으로 ‘힘의 의지(권력의지)’에 대해서는 2부에서 다루게 된다는데 그 때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시간입니다. 니체는 이 책을 “미래의 성서”이자 “인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당당한 자신감을 가진 니체에게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채운 선생님께서 계속 강조하신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시(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들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일까...(곰곰). 그의 소리를 ‘포착’해 내는 예민한 감각은 부족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즘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니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자신의 개인적 문제이든 보편적 인간 실존의 문제이든지 간에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는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기도 어렵지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나의 길동무가 되어 주지 않을까요?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우리는 ‘듣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나 ‘지휘자’가 될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악보와도 같다. 그것을 어떻게 연주해낼 것인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채운 선생님 말씀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오오~ 차분하고 침착한 후기!! "읽지 말고 들어라!" 하~ 이게 뭘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