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사야 벌린.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이사야 벌린(1909~1997)은 레몽 아롱, 칼 포퍼, 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과 더불어 이른바 ‘냉전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1945년 독일이 패망하고 나서 2차 세계대전 중에 잠정적인 동맹 세력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점차 괴리가 생겨나게 된다. 동유럽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서유럽에서는 미국의 유럽부흥계획(마셜 플랜)에 따라 원조가 이루어졌으며,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성립,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냉전은 사상 분야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1947년 국제 공산주의 정보국(Cominform)을 설립하여 미국과 서유럽의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나날이 유럽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에게 성가(聲價)를 높여 가는 공산주의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가치를 선전하기 위해 1950년 창립된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에 대해 막대한 재정 지원을 했다.

냉전 자유주의 사상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태동하고 전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냉전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이 사상가들 중에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이론가는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비난한 <지식인의 아편>(1955)을 쓴 아롱은 사회학자였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을 쓴 포퍼는 과학철학자였으며, <노예의 길>(1944)의 하이에크는 경제학자였다. 벌린이 정치사상가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정치이론가라기보다는 지성사가로 여겼다.

전후 소련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정보분석가로 활동한 뒤 지성사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1945년 2월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회담을 열었다. 통상적으로 이 얄탸회담을 시작으로 동서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와 직접 관계가 없는 정치 사상에 관한 저술을 한 이유는 유럽 문명이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그와 별 차이가 없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의 위협 아래 붕괴할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전체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이들을 연결하는 사상적 끈이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사상은, 미국의 정치학자 주디스 슈클러의 용어를 빌리면 “공포의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냉전 자유주의의 근본 관심사는 어떻게 최선의 것을 성취하느냐 여부보다는 어떻게 최악의 것을 방지하느냐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벌린은 정치철학적으로 이를 가장 정교하게 옹호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09년 러시아의 라트비아에서 성공한 목재상의 외아들로 태어난 벌린은 1920년 볼셰비키의 감시와 억압에 위협을 느낀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망명했다.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한 뒤 순탄한 학문적 경력을 쌓던 벌린은 2차대전이 발발한 뒤 미국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정보분석가로 활약하면서 영국과 미국 정계와 언론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한다. 전후 소련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역시 정보분석가로 활동한 뒤 다시 학계로 복귀한 벌린은 자유주의 정치사상가 및 지성사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전체주의의 위협과 공포 속에서 
‘냉전 자유주의’의 근본 관심사는 
‘최선의 성취’보다 ‘최악의 방지’였다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잠그고 
단 하나의 문만을 열어놓는 행위는 
각자 고유한 삶을 지닌 인간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의 핵심은 간섭의 부재에 있다

벌린은 1958년 옥스퍼드대학의 사회정치이론 분야 치첼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자유의 두 개념”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이 글은 그 이후 영미 정치철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후반 영미 정치철학계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가 된다.

“자유의 두 개념”은 자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하나는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간섭 없이 주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거나 또는 자신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보존되어야 하는 영역은 어떤 영역인가?”(<이사야 벌린의 자유론>)라는 질문을 중심적인 문제로 삼는 자유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로, 이것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있는 통제나 간섭의 원천은 무엇 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 개념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개인의 소망”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곧 이는 내 삶과 결정이 여하한 종류의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소망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자기 지배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개념이다.

벌린은 이 두 가지 개념 중에서 소극적 자유 개념을 더 중시한다. 그 이유는 우선 적극적 자유 개념이 지닌 문제점 때문이다. 벌린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 개념은 가치에 관한 일원론적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가치 일원론이란, “사람들이 믿어온 모든 적극적 가치들이 궁극적으로 양립 가능하며, 어쩌면 그것들 사이에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확신”을 가리킨다. 곧 겉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상이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치들은 서로 양립 가능하며 심지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그 중요성의 정도가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 가치 일원론의 논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가치들의 중요성의 정도를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성이 자유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이 좀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목적인지 합리적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되며, 그렇지 못한 것은 자유는 자유이되, 바람직하지 못한 자유로 간주된다. 벌린이 보기에 여기에서 전체주의까지는 고작 한 걸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 따르면, “국가, 계급, 국민”이라는 주체가 이성 내지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진정한 자유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벌린에게는 “간섭을 피한다는 소극적인 목표”야말로 자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잠그고 단 하나의 문만을 열어놓는 행위는 열려 있는 문으로 나타난 길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또 그런 조처를 취한 사람들의 동기가 아무리 선의를 지닌 것일지라도”, 그것은 각자 고유한 삶을 지닌 인간 존재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유의 핵심은 타인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간섭의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에 비해 소극적 자유를 자유 개념의 핵심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적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가 오히려 자유에 대한 지배로 전도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소극적 자유는 훨씬 더 드물다는 점이었다. 벌린이 보기에 당대의 역사적 현실은 이를 강력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벌린의 자유론은 그의 가치 다원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들은 서로 공약 불가능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이것들 사이에 우열을 가늠할 만한 일원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원적 가치가 갈등하며 공존하는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노예 제도나 유대인 대학살 등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피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치 다원론이 허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벌린을 포함한 냉전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이에크를 제외한다면, 아롱이나 포퍼, 벌린은 모두 나름대로 가치의 다원성에 기반을 둔 열린 사회를 정치적 이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개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포퍼나 아롱, 벌린이 단순히 반공주의를 전파하는 데 동원된 지식인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의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벌린을 비롯한 이들의 사상이 얼마나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자유를 가장 위협하는 것이 전일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쟁 질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극적 자유 개념이 사람들의 자유 및 가치의 다원성을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간섭의 회피라는 이름 아래 시장에서의 전횡을 묵인하고, 간섭주의(paternalism)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책임을 가로막아온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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