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에 있다고 진단하고 제3의 경제 주체인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이론>에서 제시된 이러한 해법은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주요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에서 발원하여 2008년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고 에이아이지(AIG)가 구제금융 신청을 하면서 본격화한 세계 금융위기 당시 가장 많이 거론된 경제학자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였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경제위기가 닥치자 케인스주의 정책이라고 널리 알려진 정책들, 곧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앞다투어 실시했다. 죽은 지 60년이 넘는 경제학자가 이처럼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상과 무관해 보이는 실무적 인간도 사실은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라는 케인스 자신의 말을 입증하는 것일뿐더러, 경제학자로서 케인스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른바 ‘케인스주의적 처방’을 시행했음에도 경제위기는 진정되지 않고 2010년 무렵에는 유럽으로 불길이 옮겨가 유럽 각국의 재정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빗대어 말하자면 경제위기의 유령은 여전히 세계 경제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셈이다. 케인스주의는 이제 정말 종말을 고한 것인가?

케인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1919)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종결된 뒤 유럽의 평화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한 파리 평화회의에 영국 협상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케인스는 극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독일 자산을 몰수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데 혈안이 된 연합국 대표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아닐뿐더러,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더 나아가 패전국 국민들의 복수심을 자극하여 또다시 극단주의적인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는 승전국들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이고 비인도적인 것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파헤쳤으며, 그 덕분에 책은 6개월 만에 10만부 이상 팔리면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케인스는 또한 이 책에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통화를 남발한 결과 일어나게 된 물가 상승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물가 상승과 통화 가치의 붕괴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실제로 1923년에 이르러 영국의 실업자는 110만명에 육박했는데, 이는 노동 인구의 11.4%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처럼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고전파 경제학자들 및 그들의 견해를 따르는 관료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가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지점에 도달하여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원리에 집착하여 높은 실업률을 경기 변동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화폐개혁론>(1923)에서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제시하면서 장기적으로 시장이 균형을 달성할 때를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며, 정부가 파운드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케인스는 시장의 해악을 경계했다 
특정한 개인들과 거대 기업이 
불확실성과 무지를 이용한 결과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생긴다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은 
유효수요의 부족에 있다고 보고 
직접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방임주의의 종언>(1926)에서는 고전경제학의 기본 원리인 자유방임 원리가 이제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나라를 택하고 자유방임을 버리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리는 것도 아니며, 훌륭했던 예전의 자유방임 원리를 경멸해서도 아니다. 좋든 싫든 자유방임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유방임 원리는 이중의 원리였다. 공공복리를 사적 기업에 맡기되, 사적 기업이 마음껏 성장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다는 원리다. 그런데 지금은 사적 기업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러 방식으로 제한과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사적 기업이 제한과 위협을 받고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케인스가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를 수용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케인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계급 간의 대결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교육받은 부르주아 편을 택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했으며, 자본주의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 체제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명하게 관리만 한다면 자본주의가 지금껏 출현한 그 어떤 시스템보다 경제적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자유방임주의의 종언>)

문제는 자본주의가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이었으며, 그는 특히 시장 경제 최대의 경제적 해악을 위험·불확실성·무지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특정한 개인들과 거대 기업이 불확실성과 무지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 그 결과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고용이 불완전해지고, 사업가들의 합리적인 기대마저 충족되지 못하며, 효율과 생산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 또한 이들 해악에서 비롯된다.”(<자유방임주의의 종언>)

케인스는 오랜 고심 끝에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이하 <일반이론>으로 약칭)에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는 핵심적인 문제점을 불완전고용과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서 찾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체제가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부와 소득을 임의로, 그것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데 있다.”(<일반 이론>)

대공황 당시 미국 모습.

이 문제를 분석하고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케인스는 과거 경제학의 기본 전제들을 상당수 포기하고 새로운 토대에서 경제를 분석하기 위한 틀을 마련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세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프랑스 경제학자였던 장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가 정식화한 이 법칙에 따르면 “공급은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시장이 작동하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시장은 장기적으로는 공급에 부응하는 수요를 얻게 되며, 따라서 균형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잉생산으로 인해 생겨난 경기 침체의 문제 역시 그냥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시장이 스스로 그에 대한 해법, 곧 과잉 생산된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게 되면 자연적인 시장의 작동 원리가 왜곡되어, 불황의 기간이 더 늘어나거나 지금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경제에 피해를 끼치게 된다.

하지만 케인스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해서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원인은 과잉생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효수요의 부족에 있다고 진단했다. 유효수요의 부족은 우선 기업가가 미래의 사업 전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여 투자를 줄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투자가 줄어들면 해당 사업 분야에 고용된 사람들의 소득이 줄게 되고, 이는 다시 소비의 위축을 가져온다. 미래의 경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구매 결정을 연기하게 되고, 이는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 대신 이른바 유동성 선호를 낳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경기가 불확실할수록 재화나 서비스 대신 ‘현금’을 선호하게 되고, 이는 다시 불황으로부터의 탈출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유동성 선호라는 개념은 지출보다 저축이 이롭다는 고전파 경제학의 기본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케인스는 제3의 경제 주체인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그는 직접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재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국·공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확보한 뒤 각종 공공투자 사업을 벌임으로써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경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이론>에서 제시된 이러한 해법은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주요 정책으로 채택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핵심 경제 운영 원리로 더욱 체계화됨으로써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1970년대까지 확고부동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장기적인 고용 안정과 생활의 향상을 누리게 되었으며, 사회권으로 알려진 여러 권리들(노동권, 실업수당, 의료보장, 무상교육 등)을 기본권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가 닥치고 물가 상승과 실업률 증가가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면서 전후 호황기는 종식을 맞게 되고 그와 더불어 케인스주의도 쇠퇴를 겪게 된다. 그 대신 케인스를 평생의 숙적으로 간주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새로운 경제학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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