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이론가로 알려진 발터 베냐민은 1990년대 이후 정치철학자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2부. 파시즘과 저항

4. 안토니오 그람시 : 파시즘을 극복하라, 헤게모니·진지전 
5. 발터 베냐민: 역사를 구원하는 좁은 문 
6.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 기술적 합리성이 일상을 지배할 때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오랫동안 주로 문예이론가로 기억되어 왔다. 샤를 보들레르,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에 관한 빼어난 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관한 논문이 늘 베냐민 연구의 중심을 차지해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베냐민은 현대 정치철학 연구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전환을 낳은 동력은 무엇보다 자크 데리다와 조르조 아감벤이 제시한 새로운 독해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법의 힘> 2부에서 오랫동안 잊혀온 베냐민의 초기 논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 대한 탈구축을 시도하면서 이 논문을 법, 폭력, 정의에 관한 논의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또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1995)에서 베냐민의 논문을 서양 정치철학의 역사 전체를 재독해하기 위한 준거틀로 삼는다. 두 철학자의 독해 이후 베냐민은 더는 이전의 베냐민이 아닌, 새로운 베냐민으로 재탄생한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이론적 대담성은 무엇보다도 법 일반을 정의의 타자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에 따를 경우 법은 정의의 타자가 아니라 정의의 수호자, 정의를 구현하는 본질적인 수단 중 하나다. 적어도 법이 공정하게, 원칙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렇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인 법을 제정하고 좀 더 공정한 절차와 좀 더 엄정한 집행을 통해 법의 원칙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고 집행할 것인가 여부가 정의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된다.

반면 베냐민에게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본질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그것은 법이 본질적으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따라 실행되는 폭력(Gewalt)이며, 그로 인해 순수한 정의, 또는 순수한 폭력의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에게 정의의 문제는 법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가능한가, 곧 수단과 목적 관계 바깥에서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로 제기된다.

베냐민이 ‘법의 타락’ 사례를 발견했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의회 모습.

법은 그 기원에서 폭력에 의존하고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승리의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순수한 비폭력이다

파시즘에 맞서는 세력이 
동일한 원칙으로 싸움을 벌이는 한 
승리자는 언제나 파시즘이다 
몫 없는 이들에게 정의를 돌려주는 일 
이것이 메시아가 떠맡은 과제다

베냐민의 문제의식은 그가 “개인들에 맞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 속에서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란, 법이 폭력 일반을 자신의 타자로 간주하지만, 사실 법은 그 기원에서 폭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때문에 법은 자신이 독점하는 폭력은 적법한 힘으로, 자신과 다른 폭력은 불법적인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를 부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독점하지도 못하며 폭력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베냐민은 이것을 파업권과 전쟁권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파업권은 법 질서 내부에 국가와 별개의 폭력권을 부여받은 법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따라서 법 질서 자신이 폭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전쟁권의 경우 처음에는 강탈적인 폭력으로 보였던 전쟁이 사실은 새로운 법을 부과하고 정립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두 경우에서 법은 폭력의 (절대적) 타자가 아니라, 새로운 법질서를 정초하려는 폭력과 맞서 있는 하나의 폭력, 곧 기존의 법질서를 수호하려는 폭력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베냐민은 더 나아가 모든 법적 계약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기원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어떤 법 제도가 그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폭력을 망각하게 되면 그 제도는 타락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1920년대 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의회에서 이러한 타락의 사례를 발견한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이 법 정립적이거나 법 보존적”이라면, “모든 법 이론이 파악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들에 관한 질문이 절실히 제기된다.”(<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이러한 폭력은 목적과 관련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고 사용된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적인 폭력이며, “순수 수단의 정치”다.

베냐민은 조르주 소렐을 따라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구별한다. 현존하는 지배 관계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국가권력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한에서 전자는 여전히 법적 폭력의 틀에, 따라서 수단-목적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런 한에서 여전히 폭력적이다. 반면 후자는 지배 집단의 존재 근거인 국가권력의 파괴라는 단 하나의 과제를 설정하며 승리의 모든 물질적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자연적 목적이 됐든 적법한 목적이 됐든 일체의 목적-수단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베냐민이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 폭력에 부여되는 이름인 혁명적 폭력”이라고 말했을 때, 최상의 순수 폭력은 그것이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순수한 비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가 이처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20년 뒤에 쓰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또는 ‘역사철학 테제’라고 불린다)는 좀 더 비관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전자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령이 어슬렁거리던 1차 대전 이후 바이마르공화국 초기의 상황을 반영한다면, 후자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던 파시즘 세력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베냐민을 사로잡고 있는 화두는 어떻게 해야 파시즘에 저항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고 베냐민은 파시즘과의 싸움을 시간 및 역사 개념 그 자체를 둘러싼 싸움, 따라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차원까지 연루되어 있는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가 보기에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번째 테제)이다. 곧 파시즘에 맞서는 세력이 파시즘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싸움을 벌이는 한, 언제나 승리자는 파시즘일 수밖에 없다.

양자가 공유하는 동일한 원칙은 역사를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13번째 테제)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시간관에 입각할 때 역사는 진보로 나타난다. 생산력의 발전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이며,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이 곧 상부구조에서의 진보를 낳고 사회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을 낳을 것이다. 베냐민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생각이 당시 사회민주주의의 타협주의를 낳았으며, “그 타협주의가 이후의 붕괴를 가져온 원인이다. 자신들이 시대의 물결을 타고 간다는 견해만큼 독일 노동자 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11번째 테제)

따라서 베냐민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 대신, 역사적 시간을 “지금 시간(Jetztzeit)으로 충만한 시간”(14번째 테제)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지금 시간은 역사의 연속체가 폭파되는 시간이며,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17번째 테제)가 일어나는 시간이고,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부기 B)인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베냐민의 생각이 퍽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의 독창성은 이러한 역사의 형이상학을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가 가리키는 것은 “억압받은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17번째)다. 베냐민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과거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 및 그들에 대한 구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약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2번째 테제)

역사를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으로, 끊임없는 진보로 이해하는 관점이 은폐하는 것은 과거에 패배했던 이들, 억압에 맞서 싸웠던 이들의 흔적이 역사적 시간 속에 기입되어 있으며, 또 계속 기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12번째 테제)이며, 이 계급은 “해방의 과업을 과거에 때려눕혀진 이들의 세대들 이름으로 완수하는, 최후의 억압받고 복수하는 계급”(12번째 테제)이 되어야 한다. 이미 죽어 버린, 사라진 이들, 따라서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몫 없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몫으로서의 정의를 돌려주는 일, 이것이 역사유물론자, 곧 메시아가 떠맡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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