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0월28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위대인 ‘검은셔츠단’ 단원들은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며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결국 10월30일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했다. 사진은 그 이튿날인 10월31일 검은셔츠단 단원들이 경축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2부. 파시즘과 저항

4. 안토니오 그람시 : 파시즘을 극복하라, 헤게모니·진지전 
5. 발터 베냐민: 역사를 구원하는 좁은 문 
6.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 기술적 합리성이 일상을 지배할 때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관지 <전진!>에는 젊은 당원의 글이 실렸다. ‘<자본>에 거스른 혁명’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이 젊은 당원은 러시아 혁명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 거스른 혁명이었다”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은 러시아의 경우에는 오히려 부르주아지를 위한 책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이 따라야 하는 법칙적 필연성에 관한 책으로 해석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따를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우선 자본주의적인 생산력이 온전히 성숙하고 부르주아지가 발전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들은 이데올로기를 추월했”으며, “러시아의 역사가 역사유물론의 정전(正典)에 따라 발전하게 되어 있다는 중대한 도식을 폭파시켜”(<옥중수고 이전>) 버렸다.

러시아 혁명의 위대성은 “사건의 정상적인 경로”에서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집합적 의지를 단숨에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전쟁이 낳은 거대한 고통의 경험과 사회주의적 선전을 통해 수백만명의 민중은 하나로 단결할 수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을 그토록 비천하게 만들었던 노예의 사슬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에 나섬으로써 “그들의 이상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을 스스로 창출”(<옥중수고 이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역사가 숙명적인 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전개 과정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 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입증해주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아래 사진)라는 이름의 이 젊은 당원은 1919년 <새로운 질서>라는 사회주의 문화 비평 주간지를 창간하고, 토리노에서 공장평의회 운동을 이끌면서 곧바로 이탈리아 사회당의 지도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혁명에 대한 사회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동료들과 함께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다. 1919~1920년 2년 동안 토리노를 중심으로 전개된 공장평의회 운동은 그람시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이탈리아에서도 곧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지만, 북부의 일부 지역에 제한된 운동만으로는 혁명이 수행될 수 없었다. 더욱이 공장평의회 운동 자체가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곧바로 반동 세력들의 보복과 탄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실제로 얼마 뒤인 1922년 사회당의 과거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 사병조직인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이탈리아 부르주아 세력은 무솔리니와 파시즘을 활용하여 좌익 세력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무솔리니는 국왕을 위협하여 총리 자리에 오르고 차츰차츰 파시즘을 지배 권력으로 확립해갔다. 하지만 파시즘이 점차 정치 권력을 장악해가던 시기에 이탈리아 사회당과 공산당은 내부 분열에 빠져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그람시 자신은 1922년에서 1924년까지 약 2년 동안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과 빈(비엔나)에 체류하고 있었다.

당시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탈리아 좌파 역시 파시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명 높은 1929년 코민테른 9차 대회의 ‘사회 파시즘’ 테제, 곧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파시즘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테제가 말해주듯이 파시즘을 자본주의 최후의 위기의 산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한 비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하루빨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반면 토리노 공장평의회 운동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파시즘 운동의 전개 과정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그람시는 파시즘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반동적인 자본가 세력과 프티부르주아 및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구조적인 현상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후원 아래 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한 그람시는 파시즘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제3차 이탈리아 공산당대회에서 발표한 ‘리옹 테제’에서 농민과 프티부르주아를 파시즘 세력과 분리하는 것이 당의 주요한 과제라고 천명한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이라는 글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분석하기 위한 그람시의 첫 번째 시도였다.

안토니오 그람시

러시아 혁명은 역사유물론의 
중대한 도식을 폭파시켜 버렸다 
역사는 숙명적인 법칙이 아니라 
창조해가는 과정임을 입증했다

헤게모니 계급은 조합적 이익을 넘어 
사회의 공통 이익을 실현해야 한다 
그람시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찰한다

하지만 1926년 12월 그람시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8년 파시스트 검찰은 “우리는 이 두뇌의 활동을 20년 동안 중지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죽을 때까지 공산당의 활동과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람시는 집필을 허락받은 1929년부터 건강 악화로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된 1935년까지 감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옥중수고>라는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겼다. 만약 그가 수감되지 않았더라면, 당시 소련과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의 정치적·개인적 운명이 훨씬 더 비극적이었을 확률이 높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역설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3000쪽이 넘는 <옥중수고>의 중심 주제 중 하나를 이루는 헤게모니와 진지전에 관한 그람시의 사유는, 초기의 공장평의회 활동, 그리고 수감 이전에 시작되었던 파시즘과 대중 운동에 대한 그의 성찰과 분리될 수 없다.

페리 앤더슨이 보여주었듯이,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러시아 혁명가들이 차리즘의 권위주의 통치에 맞서 노동자 계급이 농민을 비롯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사고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은 헤게모니를 혁명을 위해 노동자 계급이 채택해야 하는 전략의 차원에서 사고했지만,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계급 관계를 비롯한 권력관계 일반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이자 역사적 이행 일반을 사고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람시가 볼 때 근대 국가는 이전의 국가들과 달리 무력을 통한 지배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광범위한 계급 및 집단의 동의 아래 지도력을 인정받은 계급에 의해 통치되고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해 헤게모니 계급은 자신의 조합적, 경제적 이익을 넘어 자신의 동맹 계급들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 계급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헤게모니 계급으로 자신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헤게모니는 어떤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헤게모니 계급은 자신의 헤게모니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곧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의 공통적인 이익을 실현하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헤게모니 위기가 발생하는데, 그람시는 1910~1921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간주한다(<옥중수고>).

이러한 위기의 시기는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계급과 이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계급 간의 투쟁이 벌어지는 시기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및 그 지도 세력(사회당 및 공산당)은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데 실패한 반면,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헤게모니를 쇄신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곧 19세기 민족부흥운동(Risorgimento) 이후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계속 나타난 것처럼, 이탈리아 지배 계급은 위로부터의 혁명인 수동혁명을 통해 대중의 참여를 가능한 한 배제한 가운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운동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람시는 유명한 ‘진지전’ 개념을 제안한다. 정치권력의 장악에 초점을 맞추는 ‘기동전’에 비해 진지전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국가 권력의 장악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는 대중의 지적, 도덕적 개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또 하나의 지배 계급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계급 지배 자체를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혁명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장기적인 민주화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람시의 사상이 여전히 긴요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사상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사고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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