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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확장되는 허공. 천정. 다시 저녁이다. 밤이 아니라면 저녁일 터. 불사의 태양이 다시 죽어가고 있다. 한편에는 타다 남은 불. 다른 한편에는 재. 이기고 지는 끝이 없는 승부. 누구도 알 수 없다. -사뮤엘 베케트


서문


서문은 대개 최후에 쓰인다. 기묘한 일이다. 결론이 나고서도 또 그 뒤에 오는 것이 가장 처음에 읽힌다니. 그런데 이것은 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아닌가? 이것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도, 쓰고 있는 필자에게 있어서도.

책을 쓴다는 것은, 책을 쓰는 그 시간의 정처 없음을 견디는 것이다. 게다가 너절하게 모아놓은 것이 아닌, 일관된 책을 쓰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렇다, 알고 있는 방식으로 쓴다면, 그것은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대강의 계획이 있고, 오랫동안 써 모은 노트도 있고, 자료도 충분히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연성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과 알 리 없는 것들을 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여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 심히 망연자실 하는 것이다. 건망과 편집광적인 기억이 잔물결 치듯 나지막하게 고동쳐, 하루하루를 혼탁하게 만들어 괴로워한다. 자신의 몸도 정신도 아닌 그 사이, 구분 가능한 어딘가에, 조금씩 스며드는 잉크로 문신을 새기고, 그 문양을 모르는 스스로에게 경악하는 것이다.

어렴풋한 광기의 소리와 열기를 띤 뺨,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해 차가워지고 마비되어가는 손가락 끝 사이에서, 뭔가 뒤엉킨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 신음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그 순간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책 전체의 구성을, 그 논지를, 그 논리를, 명징한 도식으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책을 쓸 필요는 없게 된다. 전부 알고 있다면, 책을 쓸 필요가 어디 있으랴. 전부 알고 있다는 따위의 난잡한 모양의 환상에 취해있을 거라면.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 위압적으로, 고자세로 내려다보는 지식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게 쓴다는 것일까.

이 책은 <야전과 영원>이라 이름 지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야전과 영원"에 대해서, 혹은 "영원한 야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자크 라캉, 미셸 푸코, 피에르 르장드르, 이 세 명의 텍스트를 부족하게나마 철저하게 읽고, 그것을 신중히 재단하고 날실과 씨실을 풀어 다시 짜는 작업을 묵묵히 이어나간 결과, 거기에 지금 필자가 "야전과 영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시공이 출현했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이었다. 그것이, 방금 말한 신음소리, 우연, 알 리 없는 것을 써나가는 소스라칠 만한 시간을 거쳐 왔음을, 이런 서문이 잊게 만들지는 않을까. 그렇게 흔쾌히 망각하면서, '통일적인 관점'이나 '이 세 명을 논하는 필연성'이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굴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해후와 우연한 만남, 어려움도 머뭇거림도 잊고.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지금의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 망각을 자아내고 우연한 신음을 눌러 죽이는 그런 날조된 언어를 쓰는 것이. 써 버린 것이니까 말이다. 최후의 문장을 쓰고 있으니까. 돌이켜보면서, 나중에야, 얼마든지, 의기양양하게 <이 책의 의도>라고 말하는 게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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