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의 질문은 이렇게 된다. 이 비판은 맞는가?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푸코의 어떤 사고방식에서 나왔고 이런 비판으로 인해 푸코는 어디로 빠져나가는 걸까? 우리는 제1부에서 라캉의 <두 개의 흐트러진 눈>을 규명하고 그가 <대타자의 향락=여성의 향락>을 드러내며 좌절함을 보았다. 그리고 제2부에서 르장드르가 라캉의 <두 개의 흐트러진 눈>을 인용하며 <우리가 여성의 향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큰 거품을 일으키며 <역사적 도박장>으로 풀려남을 본다. 우리가 달려온 이 논리는 헛된 것일까? 잘못된 것일까. 어떤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성급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재차 서두를 두느니 우리는 여기에서 급속도로 템포를 낮춰, 푸코의 <감옥의 탄생> 이하의 논지를 하나하나 주의 깊게 더듬어가야 한다. 물론 그것은 이 비판을 성실하게 고찰하여,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졸속은 허용될 수 없다. 넓은 우회와 정밀한 요약은 불가결하겠지만, 푸코가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엄밀하게 간파하지 않고서는 이 비판에 부응할 수도 없으므로. 물론 정치하게 논지를 쫓는 나머지 읽기 번거로운 요약이라는 논란도 당연히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 둔다. 푸코의 논지를 자세히 아는 분은 이 제3부 제1장에서 제6장까지는 건너뛰어 주셔도 괜찮다고. 자, 다시 시작해보자. 우선 이 비판의 전사前史를 구성한 하나의 대담을 재차 인용해 본다. 그 저작 안의 유난히 눈에 띄는 서술 지점은 도리어 혹독할 정도로 정신분석 비판 경향이 짙은 <앎의 의지>를 출판한 푸코가 라캉의 ‘정통후계자’인 자크-알랭 밀러 Jacques-Alain Miller등 정신분석가들과의 대담에 초대될 때의 기록이다. 독자에게 다소 대놓고 심한 논쟁의 장이라는 인상을 남기겠지만 이것은 푸코가 르장드르의 의견에 접촉한 최초의 문서이므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위에서 아래로, 중심에서 주변에서 흐르는 것이 아닌 그것의 미세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작용하는 마이크로한 부분에 대해서 분석하려고 하는 이 시대의 푸코는 논지에 대해서, 연구자 그로리샤르(?)는 <앎의 의지>의 어떤 부분에서 푸코 스스로 권력을 위해서 아래로 이르는 것처럼 서술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까지 문제 삼아 지나치게 따지는 지적에 대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