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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권력과 전략”

제53절 어느 비판

1977년 겨울의 일이다.

<레 레볼트 로직 Les Révoltes logiques> 제4호에 짧은 대화가 게재된다. 이 "권력과 전략"이라 명명된 “문서에 의한” “즉흥적인” 대화는 발언과 분량 그리고 내용으로 판단해보면 오히려 인터뷰에 가깝다. 청자는 알튀세르의 제자로 출발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37살의 자크 랑시에르. 화자는 이제 막 51살이 된 미셸 푸코 바로 그 사람이다.

랑시에르의 첫 질문으로 인해, 이야기는 소비에트의 강제 수용소를 둘러싼 담론을 비판하며 시작한다. 푸코의 대답이 계속되고 문단이 끝나기 조금 전, 랑시에르의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권력의 행사에 관한 물음은 대개 오늘날 (지배자에 대한) 사랑이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주체화의 계보학을 저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또한, 주체화에 의해 그 기능이 미화되어버리는 합의 형식이라든가 “종속되는 이유”를 짚어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性을 둘러싸고 지배자가 불가피하게 된다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성의 주변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전복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어느 쪽이든 권력은 금하는 것이라고 표상되어, 법은 그 형상이고 성은 그 질료라고 표상하기 마련입니다. 이 모순된 두 언설을 정당화하는 이러한 장치는 프로이트의 발견인 “사건”에 이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의 경제학 내부에 있는 성의 특정한 기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다소 성급하고 생경한 이 물음, 그리고 분명히 자신의 저작에서 촉발된 이 질문에 대하여 푸코는 “지배자에 대한 사랑과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라는 두 가지 관념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이 둘을 분리하고, 파시즘 분석의 관점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삽입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다소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는 “지배자에 대한 사랑(amour du maître)이라는 관념은, 또 몇 가지의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서 이 “지배자에 대한 사랑/지배자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 어조는 정열적이고 간결하며 엄중하다. “이 관념은 권력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이 문제를 분석할 수 없을 것처럼 제기하는 방법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주인과 노예, 스승과 제자, 장인과 직인, 법과 진리를 알리는 지도자, 검열하고 금지하는 지배자”라고 열거하고, 지배자·주인·스승·장인·지도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maître(메트르)라는 관념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권력의 심급을 이런 ‘지배자의 형상(la figure du maître)’으로 환원해 버린 것이 실은 이미 하나의 환원에 견고하게 결부된 것이라고 푸코는 다그쳤다. 요컨대 그것은 “권력의 절차를 금지법으로 환원하는 것”에 결부된 것이라고.

이와 같은 환원이 낳은 오류 또는 편향을 그는 하나하나, 순서대로 세 가지를 열거해 나간다. 우선 이런 환원에서 권력은 “등질적等質的”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국가, 교육 분야, 생산 분야 등 어떤 영역에서도 권력은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가? 라고 생각하고 만다. 두 번째는 “이 환원에서 권력은 거부, 제한, 방해, 검열이라는 부정적인 용어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평소 권력은 “부정(non)을 말하는” 것으로, 부정을 말할 뿐이므로,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모두 “위반(transgression)"일 뿐이다. 즉 스스로 법을 침범할 때의 가치를 자신을 금하는 법에 두는 위반, 이 기초적인 역설을 되뇔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지적. 말하자면 “이 환원에서 권력의 근본적인 작용이 법의 발화나 금지의 언설 등 발화행위(un acre de parole)라고 간주 된다.” 즉 이 환원에서 권력은 “너는 해선 안 된다”는 순수한 발화행위, 요컨대 부정을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푸코는 이러한 권력 이해와 깊이 연결되고, 또 거기에서 많은 혜택을 받아 온 분야를 지목한다. 그것은 "인척 관계의 위대한 금지의 분석에 주안점을 두는 민족학"이며, 또 "억압의 메커니즘에 주안점을 둔 정신분석"이다. 이러한 권력은 유일하게 동일한 "금지"를 말하는 것으로만 말해진다. 권력기관이 "모든 사회 형태에서, 모든 수준의 종속=주체화(assujettissement)에" 꼭 맞게 적용해간다. 그가 이렇게 초역사적인 행동을 무엇보다 싫어한 것은 주지한 대로이다. 그리고 응축된 발언이라고 말하는 것에 걸맞게 바로 뒤에 놓인 것도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인용해보자.

그런데 권력이 부정(non)을 말하는 심급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이중의 “주체화(subjectivation)”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측에서는 권력은 금지를 언명하는 '거대한 절대적 주체'의 일종으로서 이해될 것입니다. 그것이 실재(real)적인가 상상적인 것(imaginaire)인가 순수하게 사법상의 것이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부친이든지 군주이든지 일반의지의 주권(souveraineté)입니다. 권력을 뒤집어쓴 쪽에서는 어떤가 하면,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은 권력을 "주체화"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금지를 받아들이는 지점, 권력에 대해서 "예(oui)"나 "아니오(non)"를 말하는 포인트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말이죠. 주권의 행사에 대해 뭔가 말하고자 하면 자연권의 방기라든가 사회계약이라든가 지배자에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전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한쪽은 금지하는 역할을 갖는 주권자를, 한쪽은 그 금지에 좌우간 어떤 방식으로든 "예"를 말해야만 하는 주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전시대 법학자들이 세운 가람에서 현재의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항상 같은 말로 문제가 제기되어 왔던 겁니다. 권력을 리비도라는 용어로 취급한 현대적인 권력분석조차, 아직도 이런 낡은 법학적 사고방식에 의해 표현되고 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어째서 권력은 이런 법권리, 금지, 부정적 용어에서만 생각되어 왔던 걸까. 진정 의문이다. 푸코는 유럽 역사 안에서 법권리와 주권개념이 어느 때에는 군주권력에 가담하는 것으로서 기능하고, 어느 때에는 군주권력에의 투쟁수단이 되어왔던 사실을 시사하더라도 "결국 법률은 권력을 표상하는 주요한 양식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신경 써서 이 표상이라는 어휘에 주를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표상이라 하는 말은 스크린 환영이라고 할 수는 없고 현실의 행동양식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법은 오래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법은 "권력의 진리"가 아니다. "법이라는 형식이나, 법이 초래하는 금지라는 여러 효과는 법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메커니즘 안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는 법에서 "권력의 진리"라는 자격을 포획하는데, 그것은 "복합적이면서 동시에 부분적인 도구"라고 선언하며 이 비판을 끝낸다.

여기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는 것은 누구나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이나 행동 따위를 금하고, 그것을 억압하며, 권력은 우리에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검열하거나 배제하거나 요컨대 있는 그대로 우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우리가 권력에 강제 받고 있다고 강하게 느끼는 순간은, 우리들의 욕구가 어떤 “규칙”에 의해, 법에 의해, 금지에 의해, 도덕에 의해 방해받는 그 순간이지 않은가. 또한, 그것에 의해서 역으로 욕망이 불타오르기도 하는 그때. 게다가 법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세상에는 권력자라는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많은 자유를 구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권력이 없는 서민인 우리는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 무엇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라고 끊임없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이런 것은 우리들의 상식에 따른 일인데,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주권이나 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을 하나하나 예로 들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푸코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것이다. 권력은 법이 아니다. 권력은 금지가 아니다. 권력은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은 애초에 “부정”이 아니다. 권력이 어떤 특정한 인간이나 제도로부터 생겨나는 법이며, 부정의 발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의 실제를 잘못 본 것이라고. 그렇다면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싶다”고 그는 말을 이어간다. 몇 개의 항목으로 정리하면서 이것을 쫓아가자. 우선은 설명을 빼고 열거해보겠다.

하나, 권력은 “항상 이미 그곳에 있다.” 권력의 외부에 놓인 채,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여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과 사회의 넓이는 일치한다. 권력의 그물망 틈새에, 기본적인 자유의 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법의 절대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즉, 법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 권력은 사회 전체에 침투해 있어서,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는 그 안에 완전히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바깥에 있어서, 권력을 전반적으로 조작하고 통괄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양한 권력관계는,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 (생산관계, 인척관계, 가족관계, 성적관계) 안에서 짜여 있다.” 그 관계 안에서 권력관계는 조건 짓는 역할과 조건 지어지는 역할을 동시에 행한다.” 그러나 “이들 권력관계는 금지와 징벌이라는 단일한 형식에는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는 다양하다.”

셋, 지배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떤 하나의 통합적인 덩어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한편에는 지배자가 있고 다른 한 편에는 피지배자가 있는 “이항구조”는 없다. 그 반대이다. 조금 전 기술한 것처럼 여러 가지 권력관계의 조합이 “전략으로서 조직”된 결과로서 이러한 “지배의 일반적인 모든 사실의 윤곽이 그려지는” 것이다.

넷, 이러한 다수의 권력관계가 유용한 것은, 근원적인 것으로 부여된 경제관계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수의 전략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다섯, “저항 없는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저항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올 필요는 없으며, 권력이 있는 곳에는 그때마다 이미 저항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여기에서 푸코는 권력에서 자유로운 지배자와 권력에 의해 속박된 피지배자 사이에, “금지와 징벌”이라는 법적인, 즉 “안 된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언어 관계만이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유일한 모델로 하는 권력의 이해를 비판하고 있다. 정신 분석과 인류학은 런 이해에 구속되고 있다고.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대화에서 푸코의 비판은 두 가지 부분과 그 두 부분의 이음새가 되는 한가지의 글귀로부터 성립한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에의 사랑”이라는 관념의 비판과 “권력의 법적인 사고방식, 권력의 금지 발화에의 환원”이다. 이 두 가지 비판을 연결하는 한편 분리하는 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인용한 “권력의 심급을 지배자의 형상으로 환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환원에 결부된다. 다시 말해 권력 절차를 금지법으로 환원 한다”라는 글귀이다. 지배자의 형상으로의 환원이 금기의 법으로의 환원에 결부되어 있다. 이 결부에 실은 중요한 문제의식이 가로놓여 있다고 한마디만 말해 두고, 계속 보자.

여기까지 푸코의 비판을 따라오면, 구조주의 이후의 갖가지 이론, 통속적이든 세련된 것이든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는 이론의 이러저러한 개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생각해내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비판되는 것은 상징적 권력이라는 개념과 그것에 수반되는 법 혹은 공동성共同性의 이해라고 해도 좋을 테니까. 이런 비판은 푸코의 여러 강연·대화·저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다. 다소 느닷없는 의문이지만 여기서 누가 비판되고 있는가를 묻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라캉이어도 되고 물론 프로이트도 가능하다. 혹은 푸코가 다른 지점에서 지목하는 것처럼 라이히였어도.

부정하고 억압하고 배제하고 결여를 파고드는 언어적인 법 등등 상투적이기까지 한 말은 그들에게서만, 특히 라캉파에서만 유래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실제 푸코는 <앎의 의지>를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판한 것이라고 단언했던 적이 있으니까. 이를테면 푸코가 어느 대화에서 매섭게 빈정거리며 조롱한 적이 있는 지라르라든지 혹은 푸코도 공감과 반발이 교차하는 복잡한 관계를 맺었던 “금지와 위반의 인간” 바타유라 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다 확실히 이 비판은 그 논지에서 말해도 “근친상간 금지의 보편성”같은 것을 인정할 수는 없으니 레비-스트로스나 다른 인류학자도 그 비판의 사정거리 내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밖에 홉스 이후의 사회계약에 대해 새롭게 사변을 집중시키는 법철학자라든가, 그 법의 기초를 확고히 하는 계약의 합의에 이르는 정치적 프로세스를 중시하고자 하는 정치학자라든가, 언어행위에 대한 단순한 도식으로부터 얼마간 사회관계에 대한 교훈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사회학자라든가, 푸코가 다른 곳에서 한 발언을 모아 감안해 보면 열거하면 열거할수록 이런 인물이나 분야의 이름의 일람을 늘려가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이런 목록작성에 열을 올리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리라.

이 비판은 여러 분야의 다양한 논점이나 논의가 폭주해서 교착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이상 말해도 별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그래도 논의의 착종을 피하고자 다시 한 번 논의를 국소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재차 이렇게 묻기로 하자. 여기에서 누가 비판받고 있는가? 우리들이 보아온 푸코의 비판이 대상으로 하는 사고의 형식은 이처럼 넓게 유포되어 있고 그 비판이 미치는 영역도 광대해서, 푸코가 말하는 논지의 흐름만 보아도 여러 저작에 관한 고찰의 토대도, 보조선도 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푸코가 반복해온 비판의 이 버전, 즉 상술上述한 <권력과 전략>의 버전은 다른 버전에서는 볼 수 없는 논점과 용어가 존재한다. 그것은 동시에 기묘하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남기는 지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지배자(에)의 사랑’이며, ‘이중의 주체화’, 즉 ‘절대적 주체’와 ‘남은 모든 지점’의 동시 주체화이다. 거듭 묻는다. 여기에서는 누가 비판받고 있는가? 그렇다, 분명히 여기에서는 비판받고 있는 상대가 있다. 그를 지목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 인물의 이름은 주석에 확실히 쓰여 있기 때문. 그 사람은 피에르 르장드르이다.

제3부의 질문은 이렇다. 이 비판은 옳은가?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푸코의 어떤 사고방식에서 나왔고 이런 비판으로 인해 푸코는 어디로 빠져나가는 걸까? 우리는 제1부에서 라캉의 <두 개의 흐트러진 눈>을 규명하고 그가 <대타자의 향락=여성의 향락>을 드러내며 좌절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제2부에서 르장드르가 라캉의 <두 개의 흐트러진 눈>을 인용하며 <우리가 여성의 향락이라 부르는 것>이 큰 거품을 일으키며 <역사적 도박장>으로 풀려남을 본다. 우리가 달려온 이 논리는 헛된 것일까? 잘못된 것일까. 어떤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성급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재차 서두를 두느니 우리는 여기에서 급속도로 템포를 낮춰, 푸코의 <감옥의 탄생> 이하의 논지를 하나하나 주의 깊게 더듬어가야 한다. 물론 그것은 이 비판을 성실하게 고찰하여, 그 비판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졸속은 허용될 수 없다. 넓은 우회와 정밀한 요약은 불가결하겠지만, 푸코가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엄밀하게 간파하지 않고서는 이 비판에 부응할 수도 없으므로. 물론 정치하게 논지를 쫓는 나머지 읽기 번거로운 요약이라는 논란도 당연히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 둔다. 푸코의 논지를 자세히 아는 분은 제3부 제1장에서 제6장까지는 건너뛰셔도 괜찮다고. 자, 다시 시작해보자. 우선 이 비판의 전사前史를 구성한 하나의 대담을 재차 인용해 본다. 그 저작 안의 유난히 눈에 띄는 서술 지점은 도리어 혹독할 정도로 정신분석 비판 경향이 짙은 <앎의 의지>를 출판한 푸코가 라캉의 ‘정통후계자’인 자크-알랭 밀러 Jacques-Alain Miller등 정신분석가들과의 대담에 초대될 때의 기록이다. 독자에게 다소 대놓고 심한 논쟁의 장이라는 인상을 남기겠지만 이것은 푸코가 르장드르의 의견에 접촉한 최초의 문서이므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위에서 아래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그것의 미세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작용하는 마이크로한 부분에 대해서 분석하려고 하는 이 시대 푸코의 논지에 대해서, 연구자 글로리샤르는 <앎의 의지>의 어떤 부분에서 푸코 스스로 권력을 위에서 아래로 이르는 것처럼 서술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까지 문제 삼아 지나치게 따지는 지적에 대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고 있다.

푸코: 당신이 읽는 것을 듣고, 그렇구나. 나는 조금씩 번지는 점點의 은유를 썼구나······라는 겸연쩍음에 귀까지 빨개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명확한 한 가지 케이스에 한한 것입니다. 요컨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권력의 커다란 전략이 어떻게 권력의 미세한 관계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서 자기가 행사된 조건을 찾아내는지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또 늘 역작용의 운동도 있는데다, 그 반대로 운동에 의해서 여러 가지 권력관계를 얽고 있는 전략은 새로운 효과를 낳아 관계가 없었던 분야까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중반까지 교회는 성性 현상을 상당히 간접적인 형태로밖에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즉, 이러저러한 죄를 고백하는 의무가 부과되는 해에 한 차례 고해의 의무만 한다면 자신의 사제에게 굳이 하반신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것은 보증되었다는 거죠. 트리엔트 공의회, 다시 말해 16세기 중반쯤부터는 이전부터 있던 고해의 기술뿐만 아니라 일련의 새로운 절차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직자의 정화淨化나 교육이나 수도원 때문에 일상생활의 담론화, 자기 자신의 검증, 고백, 양심의 교도, 지도하는 자-지도받는 자의 관계, 이런 것의 치밀한 기술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겁니다. 사회 내부, 확실히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운동에서 타인이 주입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J.A밀러: 그것은 피에르 르장드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푸코: 나는 아직 그의 최근 저작 <권력을 향락하다>를 읽지는 않았지만, 그가 <검열관의 사랑>에서 한 일은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권력 관계 산출이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만 행해지고 있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용을 거듭해도, 독자에게는 아귀가 맞지 않는 비판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울 것이다. 1977년, 마셸 푸코는 51세. 이미 서술한 것처럼 그는 출판 자체가 사건과 같은 저작을 몇 권이나 출판하며 “투사이자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 정치운동의 소용돌이와 유럽 지성의 중심에 동시에 그 존재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족일 것이다. 사실 이 무렵 푸코의 비판대상이 된 인물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 이지만, 여기서 바로 그 대상이 된 피에르 르장드르는 이미 47세로, UN 직원으로서 가봉, 세네갈에서의 긴 근무에서 귀환하여 로마법, 교회법, 스콜라학과 관련한 법제사의 젊은 석학으로서 파리 제1대학 법학부 교수에 취임한지 이미 9년째였다. 이 해에는 고등연구원 종교학부문 교수에도 취임하여 공적인 경력으로도, 라캉파 안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인물이었지만, 법제사法制史나 행정사史의 극히 전문적인 저작을 뺀 이론적인 저작은 2권 뿐이었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 적어도 콕 집어 이름을 지명한 것에 대해, 르장드르는 이 비판에 반론다운 반론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그 반응은 역시 뭔가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 논지의 도마 위에 올려놔도 잘 삼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왠지 여기에서 참조하고 있는 두 권 <검열관의 사랑-도그마적 차원에 대한 시론>, <권력을 향락하다-애국적 관료제에 대한 개론>이라는 두 권 이후에도 그는 원칙적으로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요컨대 바꿔 말하면 르장드르가 걸어온 이후의 이론적 도정은, 물론 용어가 아직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이 있다고는 해도, 이 두 권에 그대로 잘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푸코의 이 비판,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동요시켜 막연하게 만들기 충분한 이 비판은 정당한가? 르장드르 의론에 대한 비판이기는 했던 것일까?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큰 폭의 우회가 필요하다. 푸코 이론 끝까지 그것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여기서는 권력이 “부정을 말하는” “언어적” “법”이라고 하는 이해와 그 법을 발화하는 것이, “절대적 주체”에의 사랑과 그 법의 발화에의 복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개개의 주체”라고 하는 구도 자체가 비판되고 있는 것, 그리고 푸코가 이 “절대적 주체”를 직선적으로 “주권 souveraineté”이라 동일시해버리는 것을 확실히 확인해 두자. 물론 이건 르장드르가 말하고 우리가 따라온 곳의 ‘거울’이라는 법적주체, 즉 그의 어휘로 말하면 “모뉴멘탈monumental 주체”라는 의례적 관계의 반복에 “주체”가 생산되는 프로세스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데까지 말해 두기로 하자. 여기까지 논리를 따라온 독자에게 있어서는, 아니, 르장드르에게 있어서 법의 발화라는 것은 언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논리는 “재생산=번식”을 주축으로 삼는 것인데, 그것을 “네거티브”한 이해로 일괄해버려도 좋은가. 혹은 르장드르의 “이성”이나 “주체”는 이를테면 “인류의 이성, 인류의 주체”인데, 그것을 소위 일반적인 “주체비판”이라는 문맥에서 비판할 수 있는가. 애당초 르장드르는 주권을 유럽의 이본異本에 지나지 않는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았는가. 본래 그에게 있어서 주권과 법이란······ 등등의 다양한 반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장의 반론은 삼가자. 푸코의 논지를, 쭉 쫓아가도록 하자. 그는 왜 이런 일을 이 시점에서 말하고 그리고 이렇게 말해서 어디로 빠져 나가는 걸까? 이것을 쫓지 않고는 푸코와 르장드르의 묘하게 맞지 않는, 그러나 뭔가 속단하기 어려운 공명을 울리게 하는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없으니까. 한마디만 예고해 두자. 푸코는 법을 너무나 근대적 주권과 동일시해, 그것을 지극히 격렬하고 집요하게 비판하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오려고 혈안이 되어 “법=주권”이 아닌 무엇인가를 계속 지적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무리가 있는 도주극이었다. 르장드르라면, 주권과 연결되어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법 따위, 처음부터 “유럽의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르장드르는 특히 프랑스의 예를 들어, 중앙집권적 관료제라는 프랑스 국가의 특징은 교황좌의 성직자 위계질서에서 유래하여, 기본적으로 그 행정조직은 “교황은 영토를 갖지 않는다.”는 이념을 부분적으로 떠안고 있다 지적한다. 결국, 주권국가 정의의 한가지인 영토성에 대치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주권적 법에서 도망가고자 하는 긴 도정, “법=주권”을 괄호에 넣고 없는 것이라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무모한 도피행의 그 장대한 우회 안에서, 푸코는 여러 가지 놀라운 식견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이렇게 예고해 두자, 우리는 그 끝에서 푸코의 논지를 마치 장갑을 뒤집어보듯 볼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건 우리 생각과 더할 나위 없이 같을 것이라고. 그리고 거기야말로 푸코와 생각지도 못하게 손을 맞잡는 것이 가능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 순간을 노린다. 이것이 “영원의 야전”의 시간 그 자체이니까.

그런데, 하나의 대화, 짧지만 그래서 응축된 이 대화의 문맥에 너무 집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논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푸코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여기만 끄집어내고 갑자기 들이대면 뭐가 뭔지 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곳이 있다. 이 비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짧은 대화만 주석하고 있어서는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첫째, 이 대화에서 푸코가 비판하는 권력이해의 세 가지 특징. 즉 동질적, 언어적, 부정적인 권력이라는 세 가지 특징과 그가 그 직후에 대치하는 권력이해의 특징. 즉 권력의 편재, 권력 형태의 다양성, 권력의 분산성과 전략성, 권력의 구체적 이익성, 권력과 저항의 상호내재성이라는 특징은 완전하게는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중에 “형상”의 물음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이 이 대화에 있는 주제의 불투명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빗나가 있고 어긋나 있으며 도중에 간과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인상은 대부분 불식될 수 있다.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지워도 지우기 어려운 뭔가를 구획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그것에 의해 우리 질문의 칼끝을 보다 예리하게 하기 위해서도, 이 비판의 논리를 좀 더 넓은 시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비판의 윤곽을 보다 선명하게 하여, 장대한 사정거리를 조망하는 것이 되기도 하겠지. 그 때문에 우선은 이렇게 묻기로 한다. 이 비판을 한 1977년의 푸코는 어떤 푸코인가.

우선 연대기적인 사실을 대략 서술해두자. 폴 미셸 푸코의 1977년 겨울. 그것은 1975년 <감옥의 탄생> 출판 2년 후이고, 전년 <앎의 의지>간행에서부터 1984년 <쾌락의 활용>출판에 이르는 8년 가까이 이어온 “침묵”의 시기, 출판사와의 계약상 문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럼에도 오히려 그 침묵에서 위기를 보기 시작한 논자도 끊이지 않는, 이 오랜 시간을 건너온 시기의 최초에 해당한다. 이 해 초입, 그가 <불명예스러운 자들>에 스스로 서문을 붙여 간행할 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는 일단 휴강 중이었다. 전년, 즉 1976년 1월부터 3월까지 했던 강의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였고, 이듬해, 즉 1978년 1월부터 4월까지 했던 강의는 <안전·영토·인구>이다. 요컨대 1977년 겨울의 푸코는 <앎의 의지>의 푸코이다. 동시에 수개월 후 시작한 이듬해 강의에서 “돌연, 푸코에게도 청강생에게도 새로운” 통치성(gvermentalitè) 문제를 부상시키는, 그 예감 속에 있던 푸코이다.

요컨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권력과 전략의 비판은 <감옥의 탄생> 전후에 발단하여 <앎의 의지>에서 전면 전개되어 그의 말년까지 유지된 ”법적·주권적 권력이해 비판“이론의 한 가지 변주(variant)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논점을 제거하면 “권력과 전략”에 대해서 행해진 이 비판 버전이 도출해내는 흐름은, 푸코 말기의 논리 전체의 근본적인 부분과 같기 보다는 일반적인 비판의 맥락에 합류될 수 있다. 권력은 법이고, 권력은 발화이며, 권력은 부정한다. 그는 십년이 넘도록 죽을 때까지 기묘한 동요를 품고 이러한 권력에 관한 개념화에 대해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권력을 주권적인 것으로만, 법적인 것으로만,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그는 쉴 새 없이 반복하여 말했다. 그 놀랄만한 집요함. 그것은 그가 도대체 주권적·법적인 권력의 이해를 비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이나 법 자체를 증오하는 것인지 단번에 알기 어렵게 한다. 이렇게 말해도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 이 뭔가 헤아림을 불허하는 기묘한 순간, 푸코를 읽다가 항상 찾아오는 그 기묘한 순간은, 본고에서도 몇 번이나 출현하게 될 것이다. 후기 푸코의 법적·주권적 권력 이해 비판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비판에 의해 그는 어떤 장소로 나가서, 거기에서 무엇을 찾게 되었던 것인가 이것을 보다 넓게, 더 정밀하게 보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장 푸코의 전환

“아티카 형무소에 관하여”와 “찐리의 재판형태”

제54절 배제에서 생산으로, 규율권력으로

먼저 확인하자. 후기 푸코도 말했다. 그렇다. 푸코는 처음부터 이러한 권력의 이해를 비판하지 않았다. 61년 <광기의 역사>의 단계에서는, 아니 71년 <담론의 질서>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부정성에 입각하여, 공동체로부터 배제를 행하는 법이라는 개념화에 그치고 있다. 즉 그 시절 그의 논지는, 스스로 후에 비판하게 될 법적·주권적 권력의 이해 내부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인도 다양한 곳에서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년의 푸코가 자신의 일을 회고하면서 <광기의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문구가 있다. 말하기를, 유럽의 사회학이나 사상사에서는 부정이나 배제, 금지가 실정법적 현상으로만 취급되어 왔지만, 레비-스트로스 이후 그것이 부정적인 구조와 관련하여 여겨졌다. 자신의 광기의 역사에 대한 것은 이것을 사상사에 응용한 것이라고. 법에 의한 대대적인 금지, 경계선 천명, 그것에 의해 분할되는 안과 밖, 그리고 광인에게 행해진 배제, 폐기, 부인, 억압-이라고 말하면 너무나도 이 시대의 푸코다운 구도이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담론의 질서>까지는 권력을 법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배제·제거·방해·부인·은폐와 같이 부정적 작용을 끼치면서 부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을 인정하고, 그 후에 거기서부터 탈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담론의 질서>에서도 “정신분석이 분명히 해 준 것처럼”이라고 서론을 말하면서 담론·금지·욕망의 사이에 결정적인 연계를 인정하는 발언, 즉 여기에서 법적·주권적 권력이해라고 부르는 것의 적어도 일부는 긍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즉 <광기의 역사>부터 <담론의 질서>에 이르는 초기 푸코와, <감옥의 탄생>에서 <앎의 의지>를 거쳐 죽을 때까지의 후기 푸코에는 단절이 있다. 거기에서 두 시기를 나누는 선명한 선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일어나는 것은 확실히 전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이다. 그렇다면 이 전환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아마도 71년 8월의 징계를 둘러싼 인터뷰에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이면에 있는 현상”에 지금은 관심을 돌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는 것에서 어슴푸레 예감할 수 있다. 72년 했던 질 들뢰즈와의 대담에서 “은폐된 것, 억압된 것, 말이 되지 못한 것”을 “저속하게”다루는 정신분석이나, “억압된” “붕괴된” 것으로서 에크리튀르(écriture)를 논하는 사람들-확실히 라캉과 데리다를 염두에 둔-을 매섭게 대하는 것도, 또 같은 해에 모택동 주의자들과 한 대담에서는 사법권력에 대한 격렬한 비난, 조금의 과장도 없이 비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격렬한 비난을 한 대담에서는 격렬한 사법 권력에 대한 비난, 조금의 과장도 없이 비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격렬한 비난을 그 예감 안에 포함하고 있으리라. 말하자면 “혁명은, 사법장치의 근본적인 제거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혁명적 장치가 결코 승복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관료제와 사법장치다.” 그러나 우리들의 논리에서 도를 지나친 천착을 무익하다. 여기서는 한 개의 인터뷰와 한 개의 강연을 전환점으로 인용하려고 한다. 먼저, “아티카 형무소에 관하여”라는 인터뷰가 있다.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아티카 형무소는 이 인터뷰가 이루어지기 8개월 전까지 1971년 8월 22일부터 1개월 정도 처우에 대해 항의하는 죄수들의 폭동으로 점거되어 있었다. 이 “아티카 형무소에 관하여”는 72년 4월에 형무소를 방문했던 푸코가 그 직후에 수록했던 인터뷰를 근거로 74년 봄, 잡지에 수정, 게재된 것이다. 수록에서 게재까지 2년 가까이 걸렸다. 그 사이에 푸코에게 전환이 일어난 것을 명백하다. 이 인터뷰 전반의 푸코와 후반의 푸코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전혀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으니까. 먼저 서두의 말을 가져와 보겠다.

감옥은 뭔가 고결한 인간을 효율적으로 생산한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감옥은 그런 존재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고, 행정의 측면에서도 그런 것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감옥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터무니없는 속임수이고, 순환적인 제거라는 정말로 기묘한 메커니즘인 것입니다. 오컨대 사회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 제거하고, 감옥은 그들을 때려 부수고, 뭉개버리고, 물리적으로 제거합니다.

그들이 부서지자마자 감옥은 그들을 석방해 사회에 돌려보내면서 제거합니다. 거기에서는 감옥에서의 그들의 생활, 참고 견뎠던 처우, 그들이 헤어난 처지, 그 모든 것 떄문에 사회는 반드시 그들을 제거 하여 재차 감옥으로 돌려보내고, 감옥은······이와 같이 고안되어 있습니다. 흡수하고, 파괴하고, 부수고, 그리고 축출합니다. 이미 제거된 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흡수하는 신장腎臟입니다.

감옥은 제거(éliminer)한다. 제거하기 위해 제거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법이나 언어가 말해지지 않고, 또 <감옥의 탄생>의 논지에 연결되는 듯한 “감옥에서의 비행非行자 순환”의 전조 같은 것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감옥의 기능은, 말 그대로 “제거한다”라는 동사로 이상하리만치 계속해서 반복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직 그는 감옥을 보정적인 것, 네거티브 한 작용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수년 후 <감옥의 탄생>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것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고 하니. 자, 같은 인터뷰 중 다음 문구를 인용해보자. 원전에는 완전히 같은 페이지 안에 있다.

-당신은 배제(exclusion)의 프로세스를 일종의 추상적 개념으로 연해 왔기 때문에 병원의 내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제도의 내부와 유사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티카 같은 곳을 방문해어 -실제로 거기에 들어가 봐서, 라고 해야겠지만- 배제의 프로세스에 관한 당신의 태도에 감정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보러 가서 배제에 관한 당신의 생각이 보다 더 견고하게 됐습니까.

푸코: 아뇨, 이번 방문에 있어서는 오히려 동요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문제가 명확해졌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내가 고찰해 온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마도 둘러봤기 때문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변화가 촉발됐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확실히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사회의 배제를 일반적으로, 조금 추상적인 작용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나는 이러한 작용을, 사회의 구성요소처럼 생각하는 것을, 어느 사회라도 어떤 일정수의 멤버가 그곳에서 배제되는 조건하에서만 기능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즉, 사회가 기능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배제의 시스템을 통해서인가, 누구를 배제하면서인가, 어떠한 분할을 만들어내면서인가. 어떠한 부정과 거절의 작동을 통해서인가라는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과는 반대의 표현법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즉, 감옥은 상당히 복잡한 조직이기 때문에, 감옥을 배제라는 단순히 네거티브 한 작용으로 귀착시킬 수 없다고. 그 비용, 그 중요성, 감옥을 운영하기 위해 드는 정성, 감옥에 의미 부여하려고 시도되는 다양한 정당화, 이 모두가 감옥의 포지티브 한 작용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기묘한 어긋남이 있다. 한쪽이 조금 넘는 분량에서 이 어긋남은 너무나 노골적이다. 감옥은 전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거만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단언한 것과, 감옥은 배제만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포지티브 한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까지. 이 두 문구 사이의 어긋남, 그리고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전혀 없는 “제거”와 “배제”라는 두 개의 어휘 사이에서 요동치는 어딘가에 전기 푸코를 단절하는 분할선이 있다. 다만 아직 위태로운 파선破線으로서. 무리도 아니다. 그는 이 지점에서 “부정하고 배제하는 권력”이 아닌 권력, “포지티브 한” 권력의 형태에 정확한 호칭을 주는 데 이르지는 않았으니까. 그것이 주어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아마 2003년에 발간된 “정신의학권력”의 1973년 1월 14일 강의가 그것이다. 여기에 극명한 형태로 “규율권력”이라는 명명과 그 정의가 나타난다. 이것이 간행되기 전에, 이 분할선을 확실히 하는 표시를 찾으려고 한다면, 1973년 5월 하순 리우데자네이루 주교 대학에서 5일 동안 이루어진 연속강연의 기록을 바탕으로 74년 초반 푸코의 다양한 문제의식이 한 번에 응축되어 있어 눈이 부실 정도다. 담론의 언어학적 이해와 담론 전략 게임의 대치. 그가 몇 번이나 언급한 니체의 “기원의 발명”에 대한 문제의식의 재검토, 즉 “수치스러운 기원”에 관한 열렬한 언급. 그리스도에 관한 앎과 권력의 연관이 해체되는 것에서 중세 형사재판을 둘러싼 두 개의 앎의 형태의 싸움에 대한 명석한 기술.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촉발된, 만년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예고 하는듯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원전에 대한 치밀한 독해작업. 거기서부터, 거기에서 근친상간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리를 확정하기 위한 사법적인 절차와 장치이고 “오히려 근친상간의 욕망의 상연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법의 일종의 연극화된 역사”라고, 즉 정신분석적인 독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부분은 너무나 훌륭하고, 강연 후 청중과의 대화에서도 정신분석에 의한 가족주의적 오이디푸스 신화 해석을 유머까지 느껴지는 여유로운 어조로 계속해서 비웃고는, “내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 맞습니다. 저는 이상한 녀석입니다. 오이디푸스 같은 건 모릅니다.”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푸코를 읽어 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립기까지 할 그만의 명쾌하고 예리한 난폭함인데다 폭소까지 자아내는 까칠한 심보다. 그 논리 하나하나를 직접 펜으로 덧그리고 반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논고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73년 1월에서 5월까지, 즉 <정신의학의 권력>과 “진리의 재판형태”의 시점까지 푸코가 이미 확실하게 “규율”이라 한 개념을 정식화 하는 시기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자의 제2회째 강의에서는 그가 영국 왕 조지2세가 광기에 빠져 감금되어, 주치의에게 “당신은 더 이상 왕이 아닙니다.”라는 선언을 듣고, 말하자면 치료 때문에 왕위를 찬탈 당하고 무력한 일개 신체로 전락되는 과정을 설명한 끝에, “그런 의미에서 참수되어 왕위를 뺏긴 권력 대신, 다양해서 흐려진, 색 없는 익명의 권력이 세워진 것입니다.”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으니까. 또한 후자의 제4회째 강연의 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화두를 든다. “지난번의 강연에서는 중세 형사재판의 국가통합 메커니즘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18세기부터 19세기로 가 봅시다. 이 시기에, 제가 <규율사회>라는 이름으로 이번과 당므 강연에서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규율사회라고 불리기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이미 단절의 선을 넘고 있다. 그는 후기의 푸코, <감옥의 탄생>의 푸코가 되어 있다. 법과 주권이 아닌 규율. 여기에서 언어적으로 부정적인 주권권력에 대치되는 “포지티브”한 권력에, “규율권력”이라는 이름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의 권력> “진리와 재판형태”로부터 끌어와 그 자세한 내용을 말한다면 그것은 논리의 중복이 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도, 주권권력에 대치되는 “규율권력”이 어떤 것인가를 확정하기 위해서도, 거기서부터 반사되어 보다 더 분명한 “주권권력”의 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왜 여기에서 법적·주권적 권력이해의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신분석과 인류학에 대한 비판이 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감옥의 탄생>으로 서둘러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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