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에 앞서
저희 어머니는 미술관 앞에서 카페를 하십니다. 매년 여름이면 특별전으로 '으리으리'한 그림들이 걸립니다. 저는 그때마다 그림을 보러갑니다. 하지만 매번 그림을 보는 데 실패합니다. 눈은 뜨고 있는데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림 앞에서 무슨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몇몇 작품은 왜 대단한 건지 이해가 안됩니다.(피카소가 연필로 그린 얼굴 표정 이모티콘 같은 작품...) 그냥 고상한 취미로, 감수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며 살아왔는데 욕심이 좀 났습니다. '나도 그림을 읽고 싶다!' 관광지를 다니듯 유명한 그림을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왜 사람들이 그 그림을 찬탄하고 귀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와 하나도 안어울리는 미술 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
이번주의 키워드는 '몸'이었습니다. 루시앙 프로이드와 프리다 칼로의 그림엔 모두 자신이 바라보고 고민했던 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몸은 nud라기 보다 naked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 두 용어는 벗은 몸을 그리는 서로 다른 두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해주셨지만, 이 두 구분은 현실에서 우리가 몸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도 드러나 있지 않을까요. 이 시대는 미적으로 코드화 된 몸, nude를 몸이 지향해야 할 상태로 여기고 있습니다. 삐져나온 살은 근육으로 만들어야 하고 s라인을 만들기 위해 '나올 데는 나오게 들어갈 데는 들어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미적인 기준에 어긋난 몸들, 뚱뚱한 몸, 지저분한 몸, 너무 크거나 작은 몸은 웃음거리로 전락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몸인 nude의 환상은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루시앙 프로이드의 그림은 우리에게 그 환상을 깨고 몸을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보자마자 떠올린건 목욕탕의자에 앉아 몸을 닦고 있는 뚱땡이 아저씨였습니다. 등에 문신까지 있으면 딱 일 것 같습니다. 뱃살은 삐져나와있고 몸의 색도 깔끔하거나 균질하지 않습니다. 흙먼지 잔뜩 낀 바위같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머무르고' 싶어했던 루시앙 프로이드는 이 당혹스럽고 질펀한 몸을 우리의 진실로 여길 것을 요구합니다. 그건 그의 그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몸을 똑같이 그리는데 집중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그리는 방식을 그리는데 집중했습니다. 한 모델을 80시간...(맞나요?ㅠ) 넘게 관찰하는 집중력으로 그는 몸의 물리적 속성 뿐만 아니라 그것이 풍기는 분위기와 시시각각 변하는 실존성도 포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저 거구의 움직이기도 힘들 것 같은 부담스러운 몸이 역설적으로 몸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naked로서의 몸을 자신이 직접 겪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마가 씌였길래 남들은 한번 겪기도 힘든 몸의 고통을 겹으로 겪었는지... 그럼에도 50년 가까이 살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긴... 프리다 칼로 앞에서 몸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무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루시앙 프로이드에게 몸의 진실이 관찰로서 드러난다면, 프리다 칼로는 그 자신의 몸으로 그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보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그렇게 비난을 퍼부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