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때였거나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어느 전공수업의 첫 시간. 교수님은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이렇게 적으셨다. 현상계/본체계, 감각/이데아, 현상/물자체. (왼쪽에 있는 개념과 오른쪽에 놓인 개념들은 서로 같은 계열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한 경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도, 칸트도, 플라톤도 알 턱이 없는 나를 비롯한 학우들이 갸우뚱하는 중에 교수님은 이 혼란을 단번에 정리해주기로 작정하셨다. '우리 학부생들은 여기 써져 있는 왼쪽에 해당되는 것과 오른쪽에 해당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요컨데, 우리가 아무리 논박하고 의심하고 부정해봐야 절대 흔들릴 수 없는 세상의 진리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감각으로도, 조잡한 견해로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대해 다만 '침묵'해야 한다는 것. 덧붙이자면 이런 존귀한 진리들은 말이나 글로 포착할 수 없고 다만 삶을 통해 보여질 수 있을 뿐. 그 엄숙한 수업의 첫 번째 교재가 플라톤의 <국가>였다. <국가>는 압박스러운 책의 표지까지 그 때와 똑같았지만 세미나에서 다시 만난 플라톤은 예전의 인상과 사뭇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왜 윤리교육과 꼬꼬마들에게 이 팍팍한 책을 읽게 했을까. (아직도 신입생들은 이 책을 첫 수업의 교재로 받아들고 멘탈이 가루가 되는 느낌을 체험한다고 한다.) 세미나가 끝나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교육을 통해 폴리스의 이상적인 정치적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으로 자신의 유토피아를 삼았던 플라톤의 기획이 윤리교육과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도덕적 인지/정서/행동에 대한 교육을 토대로 국가 시민의 바람직한 태도를 함양'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이들이 보기에 플라톤의 <국가>는 그 전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책일 것 같다. 교육은 시민을 키워낼 수 있다. 더 세게 말해서, 시민은 반드시 길러져야 한다!

 

 

 

 

정치체에 관한 윤리교육과의 이상이 국가의 그것과 같다고 본다면, 플라톤과 현대 국가는 묘한 균열을 일으키는 듯 보인다. 현대 국가가 지향하는 정치체의 본이 되는 '민주시민사회'는 플라톤에게 타락한 정치체의 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대신 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치의 이상향은 폴리스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철학적으로 완벽히 수련된 통치자가 이끄는 사회다. 이 통치자는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선택받는 것과도, 여론을 수렴하고 민의를 대신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다만 그는 스스로 가장 탁월하게 정의의 미덕을 행할 수 있는 자이며, 지혜 용기 절제를 두루 갖춘 인격자에 가깝다. 민주국가의 옹호자가 플라톤을 끌어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생각이 이리저리 복잡해진다

 

 

 

 

정치체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국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논의는 그의 이데아론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모든 사물을 이데아에 가까운 것 그렇지 않아 타락하고 저급한 것으로 나누려 한다. 음악의 음계나 음식에 들어가는 향료 까지 이데아에 가까운 것과 그렇지 않아 타락한 것으로 나누는 것을 보고 뜨악했었다. 당시엔 플라톤의 생각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결벽증처럼 보이기도 하고 좀 유치하게 들리기도 했다. 불멸의 고전이라고 하면 뭔가 좀 심오한 생각이 들어있을 것 같았는데,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분법만 보였기 때문이다. 첫 발제에서 굉장히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이 구도가 보이고 나서 책을 다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것이 심오한 사유라서,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상을 드러내는 사유라서 지금껏 읽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데아는 우리가 떨쳐내지 못하는 목적론적 사고와 사물에 대한 일체의 위계화된 인식을 대표하는 무의식, 혹은 그 원형이 아닐까. 니체와 푸코가 동시에 얘기했던 것처럼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근대적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직도 진행 중인 과제이다.

 




  • 지호 2014.08.26 13:52

    윤리교육 꼬꼬마에서 조금 꼬꼬마 된 거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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