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6 12:36

프롤로그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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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애매한.. 꺄뤼한 것들 색깔 칠해놨어요. 그리고 10쪽은 덜했슴돠.. 누군가 올려줘!

 

주변에서 매개/방편으로

   

  이 책을 쓰면서, 나는 하나의 근원적인 메타포에서 다른 메타포로 옮겨가는 식으로 작업했다. 내가 선을 하나의 전통으로서 구성하려는 마음을 품고, 그 선 전통을 내 연구의 대상, 연구영역으로 삼은 이래로 내가 사용한 첫 번째 은유는, 경계/주변(margins)이라는 개념이다. 권위 있는 선 저작에서 발견되는 문제들과 이론들은 그 영역으로 진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든지 혹은 (문제들과 이론들을) 문화의 한 항목으로 아는 것뿐만 아니라, 신념의 대상으로 인지해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이질화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들(연구자들)에게, 피에르 부르디외의 용어로 ‘일종의 자율적인 세계’로서 나타난다. 선 연구의 영역을 구성하는 배제/예외들은 선이 단일한 정통을 조직하면서 만들어낸 예외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교/이설적인 경향들(예외들)은 억압되거나 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주변부에서 정통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요구가 제기된다.

  8세기 무렵의 "돈오"교리가 전개됨에 따라(with the development), 이전 선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 주변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매개/방편(mediation)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로부터 다양한 중재적/매개적 스키마(명상, 좌선...)들이 파생되었다. 핵심부에서 억압되었던 매개적인 도식들/방편들은 선의 주변부에서 또 다른 것으로 다시 등장했다. (예를 들어 대중종교, 교학(敎學), 종교의식/의례를 중시하는 경향, 점진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향) 이러한 경향들이 선불교 내부에 다시 불어넣어졌으며 전통을 잠식/전복했다. 선이라는 맥락을 구성하는 것 중 하나가 대중종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떠올려보자. “맥락이란 그 장소 내부에서 작동하는 것이지, 그 주위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원적인 방법론과 순수학문 사이의 변증법은 결국 다원적 혹은 포괄적인 선과 분파적 혹은 배제적 선 사이의 변증법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에서 매개로 향하는 이 책의 전개는, 당연하지만, 전통적인 선 연구에서 방법론적인 절충주의로 이동하는 전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 하나의 예시로 내 초기의 연구를 들 수 있겠다. 그것은 북종이나 일본의 달마종과 같이 억압적이면서도 종합주의적인 선 경향에 관한 것이다. 선과 대중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나의 연구는 선이 위대한 전통이라는 견지에서부터 이루어질 것인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전통 내부에서 선 담론을 의문시하고 뒤흔들기 위해서다. 내 연구는 대중적인 그리고 엘리트적인 선이라고 부를 만한, 두 극단 사이의 내면화된 관계/뒤섞임(하나가 다른 하나에 들어간, 서로 영향을 받는)를 강조할 것이다. 그 뒤섞임이 양극단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방법론적인 다신론

 

  선의 정통성이 종합주의를 억압했던 것처럼, 학문적 정통성은 학문의 유형/양식의 법칙에 기반해 여러 유형/양식들이 뒤섞이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한 이유들로 방법론적 다원주의는 비판당한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종합주의라는 것은) 재정의하고 재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접근법을 사용하여, (접근법들) 각자의 특수성 속에서 다른 것들과 다른 하나의 새로운 대상(선), 선이라는 애매한 하나의 실재를 구성한다. 그것은 아마도 결국에는 무관심을 바탕으로, 동일한 대상에다 아주 많은 질문들을 제기하는 환영적(애매한/모호한) 절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관점으로부터 산출된 (선이라는)대상의 중첩적인 이미지는 관념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래서 그 대상의 윤곽은 불안정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덩어리의 시각’(여러 개로 존재하는 비전, 다수적 비전, 선이 아닌 덩어리로 볼 때의 비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뵐플린에 따르면 이 ‘선(線)적인 비전은 사물의 감각과 아름다움을 첫눈에 들어오는 윤곽, 즉 형태에서 찾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에 덩어리를 볼 때에는 윤곽선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해 시각의 경로에 있어서(눈이 사물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눈은 점점 윤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뵐플린은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나누는 기능을 하는 단일한 윤곽선과 사물 사이의 형태를 연결하는 모호한 경계선을 대비시킨다. 뵐플린이 형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전통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만약 몇몇 뛰어난 선사들이 단선적 비전으로 선 학파의 정교함을 그려낸다고 한다면, 덩어리로 보는 시각/비전은, 여러 대중들의 일상적인 실천을 아우르며, 그 비전은 전통을 해체하려는 경향을 지닌 학자들의 지각(perception)에 맞닿아있다. 그런데 “사물들 사이의 형태를 연결한다”는 뵐플린의 말은 연결될 실체를 얼마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과 같은 전통을 그 변증법적 긴장감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합주의적 담론(덩어리를 보는 시각)과 분파적 담론(단선적 시각)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종합주의가 명백히 이해되지 않은 한에서만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이한 관념과 테제들을 조잡하게 끼워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원컨대, 나는 앙쥬노가 “재생산* 없는 축적”(활발한 연결?접속?의 시도 없이 그저 다양한 것들이 뭉쳐있기만 한 것)이라 비판한 것을 피하고, 베버가 범신론 혹은 “가치의 다신론”이라 부른 것에 가까운 어떤 것을 성취하고자 해왔다. 이 개념은 “호머적인 전장에서 다양한 신들이 서로 투쟁하는 평화롭지 않은 공존”을 함축하고 있다. (가치들이 공존하며 싸우는, 어떤 독자가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매번 다르게 작동하는) 앙쥬노의 비판은 편견을 가지고 종합주의를 이해하고 있는 듯한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각이 종교사학, 중국학, 일본학과 같은 학문영역에도 만연해있다. 텍스트들, 방법론들, 그리고 전통들도 학자들이나 심지어 철학자들처럼 모순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실은 텍스트들, 방법론들, 전통들은 바로 그 모순들로 인해 살아남아 전개될 수 있었으며 모순들 그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적 다원주의는 해석학적이고 수사학적인, 구조주의적이고 역사학적인, 신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문화적인 것과 같이 충돌하는 접근법을 중재하려는 심지어 그 사이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이 연구는 구조주의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정신적 구조들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들은 “장기 복역”, 아주 오래 지속되어온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특정한 자유의 패턴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테다. 또한 나는 선의 수행과 교리가 매개성/무매개성, 돈/점, 중심/주변, 정통/이단, 해석학적/수사학적, description/prescription, 의사소통/수행 등과 같은 몇 개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얼마나 다양한 수준으로 구조화되었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나는 다양한 이론들 혹은 교리적 논쟁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입장의 교환이나 징후/흔적들(?)의 빈번한 도치/전환에는 무게를 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한 역전은 각 입장이 완벽한 연속성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에 가려져,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적대/대립적인 구조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불변한다. 나는 지성의 역사라는 것이 몇 개의 패러다임 혹은 메타포들의 변주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나는 이러한 구조들의 대화적 혹은 전이적 관계 그리고 역사적 혹은 유형학적 인접성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이러한 구조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페르낭 브로델이 구조주의에 가한 반론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역사가란 논쟁으로부터 “대중 운동의 불확실성, 대중 운동의 다양한 변혁가능성과 자유/해방들”을 구하고자 하는 이라면,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선사가(禪史家)라고 여길 것이다. 선 담론의 수사성이 나의 글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내 글은 오스틴이 말한 “발화매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상보적인(이론적인, 도덕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목적의 다중성/복수적인 목적들은 미시적 수준에서는 모순되는 진술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진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거시적 수준에서는, 이 책을 두 부분으로, 아니 더 정확히 두 수준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복수적인 목적들이)드러난다. 첫 번째로는, 1장에서 4장까지로, 매개성과 즉각성이라는 선의 변증법에서 도출되는 일반적인 에피스테메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제한들을 다룰 것이다. 두 번째는, 5장에서 13장까지로 이러한 진동 혹은 길항관계의 다양한 예들을 다룰 것이다. 1장은 선 전통을 관통하는 오류* 단층? 를 기술하고, 선 전통을 에피스테메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담론 안에서 재기입하려는 시도이다. 2장은 돈/점 논쟁을 (앞의) 오류의 패러다임적 표현으로 보고, 그 패러다임에 침전된 다층적 의미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동일한 에피스테메적/이데올로기적 주제를 두 개의 진리라는 개념을 통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선의 전개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방편이라는 개념을 고찰해볼 것이다. 4장에서는 선과 방편, 위계(단계)를 강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세속종교, 지방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룰 것이다. 돈 혹은 즉각적/비매개적 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선의 스승들은 영적으로 깨달은 자 임과 동시에 중재자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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