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점과 돈은 상보성(혹은 보완성)의 관계에 놓인다. 이 둘이 제각기 서로를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는 오직 점진주의를 가지고서만 관점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을 망라하는 통찰인 돈오가 모든 관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돈오주의’에는 ‘점진주의’라는 이중의 진리가 포함된다. 돈오주의라는 용어는 상이한 – 그러나 상관되는 – 두 개의 현실을 지칭한다. (1) 돈오주의는 근본적인 직관, 함축적인 인식론과 인류학, 세계와 깨달음의 일관된 개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구조를 구성하는 것’으로, 단순히 분류된 범주들일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다양체를 향해 개방된 인식론적 도식을 이끌며 또 조직한다. (2) 돈오주의는 또한 하나의 산물, 구체화된 개념, 명백하게 ‘구조화된 구조’다. 교리, 즉 경쟁자인 또 다른 ‘돈’의 가르침과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들러리를 서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점진주의를 완전한 세계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점진주의를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편의로 여겼던 전통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결론에 도달하겠지만, 이런 점진주의의 자리를 대체한 돈오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라도, 점진주의를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생각하든 혹은 제자리로 회귀하는 최초의 국면으로 생각하든, 돈오주의는 기본적으로 점진주의의 부정성을 함축한다. 이런 유형의 목적론적인 개념은 북선종에 대한 학술적인 평가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앞서 기술했듯이, 돈오주의와 점진주의는 종파주의적인 무대 위에서만 그리고 환원적인 정의(定義)를 매개로 해서만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점진주의는 돈오주의에게 논박당하지 않으며, 탈선이나 후자에 대한 최초의 국면 중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다른 한편, 표상의 차원에서 돈오주의와 점진주의는 ‘공범자’로서 각자의 대립항을 통해 존재해왔다. 이 대립항은 다양한 인식론적인 대립쌍들과 같은 여러 용어들 속에 스스로를 재기입하는 상이성의 표현을 전제한다.
낡은 목적론적인 도식의 결점은, 우리가 돈/점 이분법이 선사들의 말이나 실제 행동에서는 끊임없이 흐릿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분류상의 항목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차라리 느슨한 혹은 허구적인 패러다임을 생산한다. 패러다임은 이데올로기적인 진정한 연합과 종파주의적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집단화를 폭로하기보다는 은폐한다. 하지만 이것이 패러다임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 .....
* R.A 스테인이 제시했던 것처럼, ‘점’은 반드시 ‘돈’과 관련되어서 정의될 필요가 없다. 북선종이 남선종과의 관련 속에서 (최소한 초기에는) 정의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향관계를 탐지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정각(683-750)은 그의 초기 선에 대한 연대기가 실린 『능가사자기』에서 끊임없이 돈과 점 사이를 옮겨 다닌다. 책의 첫 부분에서 그는 ‘돈적인’ 반야바라밀로 권위를 세우지만, ‘점적인' 것으로 추측되는 능가경을 칭송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동일한 방식으로, 종밀은 ‘돈적인’ 선에서 화엄이라는 ‘돈적인 교리’로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서 충분히 점적이다) 옮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