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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言多慮 말과 분별이 많을수록
轉不相應 말하려는 것과 점점 멀어진다
絶言絶慮 말과 분별을 끊으면
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여느 때와 같이 승찬의 신심명 사구로 시작하여 금강경 오가해 16分~23分을 함께 읽었습니다. 법 아닌 법. 상 아닌 상. 보살이 아닌 보살. 중생이 아닌 중생. 보시가 아닌 보시. 공덕이 아닌 공덕. 이때 後者는 後得智, 즉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후득지란 무분별지. 깨달음 이후의 언어입니다. 대상도 대상을 바라보는 힘도 사라진 상태. 이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세간법으로 살지만 물들지 않는 상태입니다. 금강경의 설법은 이런 후득지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공과 같이 실체가 없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부득이 취할 수밖에 없는 방편으로서의 언어. 부정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언어 바깥의 언어.

상에 집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화됩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복덕을 쌓고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하는 보시를 하여도 내가 복덕을 쌓았다 혹은 내가 보시를 하였다는 마음을 가지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합니다. 한편 상이 없는 사람은 비방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아서 옛날 인욕선인은 가리왕에게 몸을 찢기면서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이 오히려 법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윤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선악과 다릅니다. 선악의 본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같은 원리로 맞물려 있습니다.불교의 윤리는 선악의 분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업을 짓느냐 아니냐의 차이. 번뇌를 지어내는 행위가 악업이고 번뇌를 없애는 행위 업을 닦는 행위가 선업입니다.

위로는 한 조각 기와도 없고 아래로는 송곳 꽂을 데도 없도다(p.382 야부스님의 풀이). 수행이란 무엇인가. 은산철벽의 순간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때는 사회니 윤리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전히 맨몸의 자기 자신과 대면합니다. 그 순간까지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평소 우리를 얽어 매는 여기저기 끈들. 그것 때문에 괴롭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끈들이 끊어지고 벼랑 끝에 혼자 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백척간두진일보. 여기서 한 발을 내딛는 것이 도약입니다. 이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덕입니다. 몇억겁의 공덕을 쌓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돌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경에서 그토록 공덕과 보시를 강조합니다. 깨달음과 공덕도 회향해야 합니다. 시주를 받은 것은 들고 있다가 누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통이고 연기의 방식입니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덕산스님의 點心 일화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과 교학을 깊이 연구한 덕산스님이 금강경에 통달하여 남쪽의 禪을 소탕하겠다고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떡 파는 노파를 만났습니다.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이오. 노파의 이 말을 듣고 덕산스님은 다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중론의 관시품에서 논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라는 시간의 구분은 우리가 편의를 위해 취하는 의식의 범주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法을 軌持라고 하듯 그러한 범주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방편일 뿐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지.

깨달음은 보리수 아래 서늘한 그늘에서 이루어진다. 고행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12연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처음 불법을 펴신 것을 초전법륜이라고 합니다. 스승들과 함께 수행했던 오비구에게 먼저 법을 전합니다. 이때 마왕이 말립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말을 합니다. 굳이 가서 말할 필요야 없겠지만 물어 보면 말해야 한다. 물어보는 자. 신심을 일으키는 자. 보살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말을 해야 한다. 이때의 말은 ‘다른’ 말이겠지요. 그런 말. 말을 하되  말한 것이 없는 무처불통의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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