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The Rhetoric of Immediacy》, Bernard Faure/ Ch.1 The Differential Tradition 중 p.12/ 수영
(…) “여래의 발자국은 (…) 서부 인도 우드야나 지방에서 오늘날 실제로 볼 수 있다. 제가신자였을 당시 유마힐이 거주했던 방도 여전히 남아있다. 제타바나 사원의 주춧돌 역시 잘 보존되어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신성한 유물들을 찾아간다면, 그것들은 때때로 더 커져있거나, 더 작아져있거나, 더 늘어나 있거나 혹은 더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유적들의 규모를 확정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떨쳐 나아가는 불법의 현현이며 불법 생명력의 표현 그 자체인 것이다.”(참고: Waddell 1997-1978:80-81)
최근의 역사 연구에 따르면 선 전통은 보리달마에 의해 인도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다소 복잡한 과정들 통해 선의 분파적 전통이 만들어졌다. 알다시피 정설에서는 초조 보리달마가 자신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였던 혜가(487-593)에게 전수하고, 그 가르침이 승찬과 도신(580-651)을 거쳐 마침내 5조 홍인(601-674)에게 이르게 된다. 홍인 때에, 흥기하던 선교는 둘로 나뉘는데, 신수가 이끌었던 북선과 혜가라는 적통자가 이끌었던 남종이 바로 그 둘이다. 한편, 홍인의 수제자였던 남악회양(677-744)과 청원행사(671-738)는 당 대에 전개되었던 선 오가(五家)의 선조가 되었고, 이 선 오가(五家)는 송 대를 거치며 단 두 개의 지파만 살아남아 일본의 임제종과 조동종을 형성했다.
전통을 찾아 나선 여섯 개의 종파들
후스(胡適)와 인순(印順導師),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세키구치 신다이(關口眞大),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과 같은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초기 선종에 대한 위와 같은 전통적 설명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에 따르면 도신과 홍인이 이끌었던 이른바 동산법문에 의해 선의 분파 전통을 창안해 내기 위한 밑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는 신수에 의해 계속되었다.(비록 그들은 훗날 그들의 경쟁자들에 의해 북선이라는 새 이름을 얻지만 말이다.) 동산법문이 대중화되면서 그곳의 인사들은 보다 먼 곳에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으려고 했고, 그 결과 법충이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능가종이라는 집단과 만나게 된다. 법충은 그의 학파가 혜가와 보리달마의 뒤를 잇도록 하였고, 그렇게 해서 북종과 남종이라는 두 파의 운명적인 연결(대립?)이 시작된 것이다.(참고: McRae 1986; Faure 1988.) 한편, 신회는 북선의 스승 신수가 아니라 자신의 스승 혜능이 육조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해서 선 전통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신회는 북선이 오조홍인으로부터 생겨난 방계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의 경쟁자 - 북선 - 이 보리달마와 그의 적통자들이 설했던 돈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점적인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대중들을 설복시켰다. 한편, 그는 정치적인 예외 상태(안사의 난, 755)에 힘입어 혜능과 자기 자신을 홍인과 동산법문의 적통자들로 삼았고, 신수의 북종선과 대립시켜 자신들을 남종선이라고 이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