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저작에서 구조주의적 모델을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역사적인 접근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접근은 전통이라는 개념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예상/추정을 강조한다. 전통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연구는 겉으로 명백히 드러난 정통성의 합의 뒤에서 기원들의 다양성과 우발성을 은폐해왔으며, 이런 방식이 모든 텍스트들에서 지겹게 되풀이돼 왔다. 그렇기에 역사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글을 쓸 때, 앞에서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내적 차이/분열/모순을 드러내 심화시켜 결국, 그것이 외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음(외적 차이 안에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야할 것이다. 선에 대한 외부적 비판이 선 전통 내부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비판들이 선 내부에서 제기된 것인지 혹은 외부의 비판들과 만나면서 내면화된 것인지 여부는 여기서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선과 다른 종파들 사이를 가르는 단층선이 선 내부를 지나가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경계선은 "함입(陷入)"되어져 있어(칼집에 넣어진 것처럼, 그 벌어진 부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바로 그 전통이라는 개념을 문제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각각의 전통이 다른 것과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한 무엇인 듯하나, 하나의 전통 내부에도 무수한 균열이 있기에.)
제이의第二義, 속제俗諦(The second order)
차이는 명백한 변화들에서는 잘 드러나지만, 표면적으로 분명한 연속성으로 인해 가려지기도 한다. 동일한 가르침, 행동, 제도는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의 지적 ․ 사회적 맥락의 변화에도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불교를 비롯한 종교적 시스템의 명백한 통일성은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유지되기 쉬운데, “동일한 개념들, 실천들일지라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사회적 경험들을 표현하려고 하면 상반된 의미를 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선의 정통성은 주변을 만들어내는 것인 바, 그 주변부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썼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쓸 수 있도록 만든 양피지)이며 해석들의 전장이다. 선의 정통성이 가지는 모호함과 역동성은 그 자체로부터 결과하는 것이다. 정통성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해석에 활짝 열려있다. (정통성은 어떤 내용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에 활짝 열려있다.) 정통 담론에 침전되어 있는 이러한 의미의 지층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전환들을 증식시키고 문제화되지 않았던 해석들을 문제화해야 한다.
먼저, 사회학적 수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내부적 차이의 첫 번째 유형은 막스 베버가 “카리스마의 관례화”라고 부르는 것에서 결과한다. 다른 종교적 경향에서처럼, 선에서도 관례화(routinization)와 순응거부(nonconformism) 사이의 변증법이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