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번역하는 게 갈수록 어렵군요-..-
앞뒤를 읽었는데도 어떤 단어/문장으로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 것들이 이번에 많았음.
특히 this 나올 때 뭘 가리키는 건지 점점 모르겠음요.
번역/ 《The Rhetoric of Immediacy》, Bernard Faure/ Ch.1 The Differential Tradition 중 p.28/ 수영
(…) 이제는 이러한 선에 대한 초창기의 구분을 상대화해 볼 때이다. 붓다는 “그가 40년 간 설법을 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된다. 이에 따르면 선의 “원본”은 어떤 “기원의 가르침”도 없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과 관련되어 “최초의” 경험 혹은 어떤 “순수한” 경험조차 없을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흔적이다. 그것은 기호에 대한 데리다주의적 감각에서 기원을 지시하는 것이자 가상 이상은 결코 아닌 그러한 어떤 흔적이다. 붓다나 유마힐의 (의미로 충만한) 침묵에 의해 무소득에 대한 통찰력이 중요시되었을 때, 그것은 시초적인 관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러면서 실체화되는 것을 위협했다. 꿈이 그러하듯 무소득의 깨달음은 상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상상될 뿐이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원본”은 완전히 각성된 의식으로 절대 현시될 수 없는 어떤 흔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중봉명본은 장자가 말하는 태초의 혼돈에 선을 비유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선의 머리에 붓질을 했다. 다른 이가 선의 발에 붓질을 하였다. 마침내 다른 이가 나타나 세 개의 선 위에 세 개의 점을 그렸다. 우리가 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렇게 장식된 선은 이제 원래의 얼굴과 닮은 점이 없었다.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왔고 이미 달라진 그 모습에 점과 선을 더 그려넣었다. 때때로 그들은 잘못된 위치에 점이나 선을 그렸고, 서로서로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래장 선, 종파적 선, 문학적 선, 이교의 선, 스라바카(Sravaka) 선, 세속 선, 호통과 막대기의 선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Chun-fang Yu 1982:433)
여기서 명본은 종밀의 시도에 대해 비판한다. 종밀이 어떤 위계의 바깥에 서 있는 것으로 선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교판사상의 체계 즉 교조적인 질서 내에서 선을 취급하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초의 혼돈에 대한 자각으로 선을 비유하는 명본 역시 빗나갔다. 장자의 우화에서 몸체가 눈과 발 등으로 분화되는 것은 혼돈의 죽음을 야기하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명본에게는 선의 태초의 몸체가 바로 그렇게 분화되어있다. 이처럼 명본 역시 그가 비판했던 과정의 일부이며 그의 주장은 그의 담론이 새겨져있는 거대한 구문 속에서 반복되거나 또는 심지어 생산될 것이다.
이처럼 분화의 과정은 선에 대한 모든 전통에 이미 작동하고 있다. 이는 조동 선사 야율조재(1189~1243)가 선의 주요 삼가(三家)에 대해 묘사했던 것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운문의 종파에서 깨어있는 자는 과묵함과 임기응변을 통해 그것을 얻지만 어리석은 자는 분별성과 충동성으로 그것을 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