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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은 왠지 좀 멋적다. ‘왜 하는가’라는 것은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 상태에서 그 이유를 묻고 있는데, 솔직히 아직 나는 진짜 ‘공부’라는 것을 시작 하지 않은 상태, 이제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은 초짜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의 시제를 나의 지금 상태에 좀 더 맞는 것으로, ‘나는 왜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어찌하여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나’ 쯤으로 바꾸는 것이 대답하기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공부를 왜 하려고 하는가

[나는]

나는 78년생, 스물 아홉살이다. 97학번이고 대학에서는 일본어와 경영학을 전공했다. ‘전공했다’지만 사실 ‘전념’하여 ‘공부’하지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므로 약간 부끄럽다. 다른 대다수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4년 동안 일본어과와 경영학과에 속해 있었다, 정도가 되겠다. 일본어과이긴 했지만 제2전공으로 했던 경영학 공부가 더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 학회니 팀프로젝트니 마케팅 대회니 등등에 참여하면서 공부는 경영학과 쪽에 더 비중을 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의 환상에 폭 빠진 초등학생의 열망이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별다른 훼손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고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대학에서는 광고동아리에서 활동을 했고, 재학시절 내내 광고대행사와 마케팅회사, 컨설팅펌 등에서 인턴십을 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당연한 듯이 광고대행사에 입사를 했고, 즐거웠다.

4년 동안 일을 했다. 직장 생활이 다 그렇듯이, 30%는 즐거웠고, 30%는 괴로웠으며, 30%는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이라는 나름의 프라이드와 월급의 기쁨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10%는 무감각으로 채워졌다. 나와 같이 졸업한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환경과 비슷한 연봉의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주위의 선배들도 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다른 기준이 없었던 것 같다. 10%의 무감각은 가끔은 [30%의 즐거움]에 붙어 나를 희망차게 했고, 또 가끔은 [30%의 괴로움]에 붙어서 나를 우울하게 했으며, 연말에는 [30%의 경제적 행복]에 붙어서 나의 쇼핑 파워를 높혀 주었다.

3년 동안 수많은 조사와 수많은 PT를 했다. 10대, 20대, 30대, 여성, 남성, 주부 등등의 수많은 타겟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비자 조사를 했고, 서베이를 진행했으며 FGI도 신물이 날만큼 했다. 광고주의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뒤집히는 컨셉을 수 백 개 만들었으며, 실행되지도 않을 시안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PT를 따기 위해 나는 마치 몸에서 수면욕을 제거한 기계가 된 것마냥 파워포인트 파일들을 만들었다. 주7일 근무가 두세달씩 이어져도 워낙에 그런 바닥이니까, 라고 생각했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거나 새벽에 집에 들어가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피곤함은 20대의 강철체력이 견뎌주었다.

그런 하루하루가 가고 연차가 쌓이고 담당하는 브랜드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답답함들도 늘어갔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은 나를 잡아 먹을 듯이 괴롭히다가도, 수정해야 하는 시안 파일들 사이에 묻혀서 사라졌다. 그런 질문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이 일은 예전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며, 남부럽지 않은 직장인데다가, 잘 쌓아가고 있는 경력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를 발동시켜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했다. 아니 사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기도 했다. 한 문제를 파고들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기에 나는 매일매일 너무 피곤했다.

회사에서는 인정을 받기도 하고 일을 해온 햇수가 쌓여서 큰 프로젝트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부끄러움과 몸의 피로는 점점 커져 갔다. 소비자들의 소비행태를, 그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내 심리를, 내 욕구를, 내 고민을 알 수가 없었고, 제품과 광고의 컨셉을 수도 없이 만들었지만 내 인생의 컨셉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획안은 한 달에도 몇 개씩 나오는데 내 인생 기획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는 계속 먹어가는데, 의지가 있었던 자리에 부끄러움이 채워졌다. 피로도 쌓여만갔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피로와 책임감에 짓눌려서 소화불량과 위궤양, 두통을 달고 살았다.

[왜 공부를]

4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중첩된 피로와 극도의 스트레스, 개인적인 고민 끝에 옮길 회사도 알아보지 않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제가 생겼다. 건강이 안 좋아졌던 것이다. 입원을 해야 했고,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주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던 모든 계획들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그동안 어떤 것을 이루는 것과 이루지 못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최소한 나의 경우 집안 환경이나 경제력, 차별 같은 외부적인 이유로 내가 원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절망한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은 나의 변덕, 나의 게으름, 나의 우유부단함이 실패와 후회의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몸이 아프고 나니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 때는 세상을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내 몸 하나 어떻게 할 수 없는 별 것 아닌 존재라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선명해졌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사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일매일 한 삽씩 떠서 호수를 파는 일이거나, 집에 있는 모든 책들을 낱장으로 뜯어 딱지를 접는 일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계속 커리어컨설턴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중요성을 역설하던 경력관리도, 직장도, 인맥도 아니었고, 돈도 아니었다. 피폐한 스물 여덟살의 겨울에는 내 안의 중심이, 줏대가 필요했던 것 같다. 뭔가 굳건한 지지대가, 발전기를 돌릴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건강이 안좋았기 때문에 다른 직종의 일을 찾는 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기도 했었고,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평론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인문학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긴 했었다. 대학 때 실용학문에 치중했던지라 역사라든지 철학, 정치나 사상 쪽에 약한 것은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쉬면서 이런저런 분야들의 책을 읽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시 중에 ‘돌아와야지 그리고 사귐을 그치고 노는 것을 멈추리라’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인 시의 뜻으로 보자면, 한 평생 이것저것 여기저기 높은 곳 낮은 곳 욕심도 부려보고 명망도 얻어본 시인이 이제 한 인생 잘 살았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안빈낙도 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구절이었지만 나에게는 왠지 계시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사귐을 그치고 노는 것을 멈추리라>는 말은 대학 입학이라거나 취업이라거나 하는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 스스로 마음이 즐겁기 위한 공부, 스스로 충만할 수 있는 노력, ‘修身’을 위한 정진으로 다가왔다.

사실 한 인간이 학문에 뜻을 두어 평생을 한 마음으로 정진해도 수천년 간 시공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인류 지식의 저장호수에 비해보자면, 그 호숫가에 발끝만을 살짝 담글 수 있을까 말까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끝만을 담그었건 아니면 호수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생이 끝나건,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전 인류적인 광범위한 지식의 양으로 볼 때 한 개인이 어느 정도를 획득했는가는 이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얼마나 오랫동안 한 곳만 바라보고 정진할 수 있느냐 하는 참을성과 노력만이 의미를 가지고 빛난다. 얄팍한 머리굴림이나 쉽게 사그라지는 정열로는 도달할 수 없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 성실함과 노력, 이 두 가지는 세상의 가치 중에서 가장 나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름의 임기응변력, 순발력, 유연성, 그닥 나쁘지 않은 머리 등등으로 성실함과 근면성이 요구되는 일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살아오던 나에게 서른 즈음에 드디어 피할 데 없이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었다.

[하려고 하는가]

예전에 재즈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처음에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 라는 뮤지션의 이름만 아는 정도였는데, 그 친구가 밤마다 전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음반을 들려주고, 각 뮤지션들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며 재즈의 계보를 훑어주어 나중에는 그의 전화 재즈강의를 통해 어느정도 해박해지게 되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베니 굿맨, 스윙, 쿨 재즈, 이런 식으로 단순한 점으로 흩어져있던 지식들이 계보를 가지고 주루룩 선으로 엮이고 이제는 음악만 들어도 어느 시대의 음악이구나,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구나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반짝이는 별만 바라보다가 주변의 별자리들을 관찰 하고나니, 천체도가 그리고 싶어졌다.

얼마 전에는 술에 대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6주간 매일매일 수업을 받으며 술의 역사와 종류, 만드는 법과 문화, 각종 브랜드들과 위스키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법, 산지와 테이스팅, 50여가지의 칵테일 제조와 실습까지 배우고 나니 그냥 간단히 ‘술’이라고 부르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술’이라는 장막 뒤에는 엄청난 이야기와 지식들이 숨어 있었다. 그 장막을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전혀 모르고 지나쳤을 것들이 그곳에서 이미 하나의 학문체계를 이루고 제국을 만들어 번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엄마와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관광객만 보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One Dollar”를 외치는 아이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살림살이를 다 합쳐도 만원어치도 안 될 것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는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각해보니 그 아이들은 오히려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럽게 생각할 필요도, 괜한 우월감에 우쭐할 것도 없다.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세계만 아는 것은 오히려 행복한 것 같다. 반짝이는 별만 바라볼 수 있었을 때는 오히려 더 단순하고 즐거운 인생이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른 별들이, 별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주의 존재를 알게되어 천체도를 그리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우주 밖에 다른 어떤 것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장막을 열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 이미 조금 열려진 틈으로 마치 무릉도원 같은 다른 세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알고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기 맛을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다. 저기에 별들이 눈부시다는 것도, 저기에 수많은 무릉도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가는 수 밖에.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더 많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조금씩 얻게 되는 앎의 기쁨과 하루치 만큼의 뿌듯함으로 행복해지는 수 밖에.

이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사실 미리부터 주눅이 들고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몇 년 동안 공부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중고등학교나 대학교때에도 나는 술렁술렁 50%공부해서 8-90점 맞는 스타일의 학생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100점을 맞을 텐데, 그냥 대충 어지간한 정도로만 공부를 하고 '최우수'는 늘 남에게 양보하며 ‘우수’정도만 유지하는 유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안 통하겠지. 이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근면성실노력’ 같은 가치들 - 나와는 멀다고 생각했던 - 을 실천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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