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과 승조는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중국의 역사, 사상, 사유 체제에서는 "듣보잡"한 불교의 언어들을
번역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로 번역해냈다는 점에서 말이다. 격의불교의 단계에서는,
도가의 개념과 용어로써 불교의 교리와 개념을 설명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들은 머리가 빠개졌을 터이다.
하지만 그들의 중간단계로 인해, 도가에서 신도가에서 거리를 두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완전 새것인 불교를,
불교가 갖는 나름의 참신성을 그 자체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아니 칠 수 없을 것 같다.
이해 안되는 지점은 무쟈게 많지만, 이만 총총하고.
단지 승조의 생평을 쓴 부분에서 말하길, 그가 [유마경]을 읽고 출가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중국과는 전혀 다른 사유 체계로서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랑 불교를 또한 친근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사대부불교.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 위진남북조라는 시대상황.
그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삶의 조건, 그 흉흉한 삶, 고통이 불교/대승불교/선종 혹은 기타 종파들의,
거대한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역쉬 번뇌가 있어야 보리가 있는 것이구나. 번뇌즉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