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법신인 불타는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만들어 동방으로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하나씩 떨어트리고 나서, 다시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1겁에 하나씩 떨어트린 시간보다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나 더 오래 전부터 이미 깨달음음 상태.
어마무지 옛날부터 깨달음의 상태였다는 것...근데 그 어마무지 시간이란게 잠깐 현상하는 인간의 경험식나으로는 측정불가능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듯....근데 그 표현이 쫌 웃김.. 삼천대천 세계를 가루로 만들어 하나씩 떨어트린다고라..ㅋㅋ
의천의 교관병수, 지눌의 정혜쌍수, ==> 외워서 시험보던 기억이.. -_-;
정토종 경전인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아자세와 그 부모의 갈등을 보면 윤회나 업을 얘기하지 않으면 중생의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유물론자(차르바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현세밖에 없으므로 업의 유전 생각할 것없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부모는 제거대상... 고통의 제거라는 면에서 별로 유용하지 않음.
일체중생을 두루 부처로 여기고 공경한다는 보불보경(普佛普敬)한다는 삼계교.. 인상적임..불교에도 이런 흐름이 있었군!! 마치 묵자 무리 같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역시나 이단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런 성자들이 20세기 돈황에서 겨우 그들의 기록이 발견되었다니! 중생구제를 직접적으로 행한 사람들.
신라는 미타신앙의 나라라는 사실은 삼국유사에서 확인됨.
성주괴공이 만이 무한 순환하는 불교의 세계에서 찰나에 현상하는 인간의 역사와 윤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마지막의 두 우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줌.
불교에서처럼 무한순환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삼천년 정도의 시간을 개괄하며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본 사마천이 죽을 땐 웃었을거란 내 생각에 확신이 듦 -_-;
욕망덩어리들의 삶도 결국 죽고 사라지고 짧게 일시적으로 왔다 가는 것. 그리고 그 반복임에 불과함을 사마천을 알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아무 의지도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공견에 빠진 것. 코끼리 몰이꾼이 길 비키라는 말을 듣지 않은 구도자와 마찬가지.
업은 의지 행위임을. 그리고 그 업이 흐름을 잊지 말아야 할 듯. 바가바드기타의 말대로 "행위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과보를 바라지 말고 행하라" 찰나의 삶이라도 역사 속 인간은 선업을 닦은 것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므로 언제나 중도에 처해야 함을 알겠다.
오온은 흩어지지만 과거의 업으로 반드시 과보가 있게 된다. 과거 업을 이어받은 새로운 존재는 사라진 존재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불타는 각각의 다른 삶을 이어주는 삶의 흐름이 있다고 함. --> *실체적 자아(아트만 같은 존재) "나"가 윤회하는 게 아님. "나"라는 것은 오온의 소멸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 업은? 과거의 내"업"을 고대로 유전받는 게 아니라 지금 "나"라는 존재의 업은 과거 "나"의 업이기도 하고 "나"라는 것을 구성하게끔 만드는 조건들의 모든 업이 동시에 나의 업이 되는게 아닌가? 그래야 과거 업을 이어받은 새로운 존재가 이전 존재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할 수 있을 듯. 이렇게 되면 혼자 선업을 쌓아 해탈하겠다는게 도저히 불가능일세! 내 업도 업이지만 누군가의 악업도 업에 연결 될 수 있으니...내가 짓지 않은 악업도 내 업으로 걸려 있을테니 다 소멸해야 해탈할 수 있으니 보살 개념이 아니 나올 수 없겠다!
(제리임다:쓰고보니 관리자 모드로 로그인 중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