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공이 둘이 아니요, 진과 속이 둘이 아니요, 유와 무는 둘이 아니다. 색공불이, 진속불이, 유뮤불이. 중론학과 공사상, 더 나아가 불교 사상 전체를 아울러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테제이리라. 세상에 한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요, 제대로 이해하고 삶의 종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으리라. 이는 현실적 언어와 경험의 논리를 넘어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선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의 드러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려고 아우성이고 발버둥치는 이 계절에 이 오래된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아득함을 넘어 아찔한 몸의 반응이 이끌려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지레 겁먹고 있거나 이 머리 아픈 사변에서 벗어나고 싶은 비겁한 변명의 발로인가? 어쩌면 무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계절이야말로 이같은 진리를 탐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몇해 전에 읽은 용수의 ‘중론’보다 어려웠으면 어렵지 더 쉽지는 않다. ‘중론’의 경우에는 논리적으로 정교한 면이 있어 깨달음까진 몰라도 이해하기는 많이 어렵지 않았는데, ‘조론’의 경우엔 같은 자리를 빙빙도는 것 같은 답답증이, 그럼에도 핵심은 분명히 잡히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간신히 한번 읽고나서 할 소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질문거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뭔가 좀 잡히는 게 있어야 질문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