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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음과 사랑

주서백선을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성현의 말로써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고 하나하나 몸으로 체험하여 반드시 하나하나를 똑똑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의혹이 없게 하십시오"  주자가 유자징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여다. 성현의 말씀을 내 안에 보존하고 성현의 말씀에 의거해서  삶을 살아가고 성현의 말씀을 이해하라는 의미이다.  성현의 말씀에 의거해서 살아가려면 나의 의욕과 언어와 행동이 성현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합당한지 벗어나는지를 성찰해서 벗어난 것은 반성을 통해서 바로잡고 합당한 것은 더 잘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하고 세수하듯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이게 해야 한다.
1. 나의 일상을 반성하기
1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엘리베이터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1층에서 내리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 안에 버려져있는 종이와 나무 젖가락을 보고는 "아니 누가 지저분하게 쓰레기를 여기다가 버렸어"라는 비난조의 말을 하였다. 아주머니의 비난을 뒤로 하고 산보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는데 쓰레기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줌마가 쓰레기를 치우기를 속으로는 기대했는데 역시나 였다. 쓰레기가 지저분하다고 느끼면 그냥 치우거나 혹 욕을 한 뒤에 치우면 좋을 텐데 아주머니의 몫은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비난하는 것 까지였다.
경서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거든 내 안을 스스로 살핀다"라고 하였다. 나에게도 타인을 비난하는 일이 있는지를 점검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비난의 어디에서 비롯되었나를 살펴본다. 타인을 비난하는 일은 흔하며 타인을 비난하는 일은 아마도 나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나의 잘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허물을 되돌아보고 허물을 발견하면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모임이 있어서 호텔서 잠을 잤다. 방이 쾌 컸다. 15명은 잘 수 있는 방이었다. 그런데 열쇠를 열쇠 꽂이에 넣으면 천장의 전등과 탁자 위의 작은 등 까지 모든 불이 들어오고 열쇠를 빼면 모든 불이 함께 꺼졌다. 옆방에서 뒷풀이를 하다가 잠을 청하러 한 사람씩 들어오는데 방에 불이 꺼져 있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때 마다 어두워서 곤혹을 치루었다. 불이 꺼져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어둠에 익숙하지 않아서 사람들을 밟거나 혹은 열쇠를 찾아서 불을 켜서 먼저 자는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였다. 나는 위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잠을 잤다. 한 선배가 잠을 자려고 들어왔다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천정에 있는 형광등을 제거하고 키는 키꽂이에 꽂아 두었다. 방은 어둡기는 했지만 탁자 위의 작은 등이 켜져 있어서 이불과 잠잘 자리는 찾는데 지장은 없었다. 선배의 행동을 보고 선배의 행동이 선한 것임을 알고 나도 그리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선한 것은 보고 배워야 한다. 나 또한 방에 들어가서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행동하기가 싫어서 포기하였다. 나는 문제를 발견은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은 대부분 행위함에 있다. 알면서 행위 하지 않는 나의 게으름은 꽤나 뿌리가 깊다. 머리만 굴려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나의 가장 큰 병통중 하나는 게으름이다. 머리만 커져 있고 행동은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평생 게으름을 경계하고 몸을 부지런히 놀리려고 노력해도 부족할 것 같다.

2. 낮음과 사랑
주자가 불교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처음에는 심하다는 생각을 들었으나 읽을수록 비판의 내용을 수긍하였다. 하지만 주희의 비판을 역지사지해보면 역시  걸리는 부분이 있다. 불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동시에 주자의 학문에도 그대로 적용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자는 유학은 모든 것을 갗추고 있지만 배우는 사람이 이해를 못할 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불교 또한 모든 것을 갗추고 있고 배우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를 못한 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무엇을 배우든지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있다. 그러한 지점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그곳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표지판을 세워 놓아야 한다. 배우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부정을 통해서 학문을 반석 위에 세울 수가 있어야한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면에서는 유학보다는 불교가 더욱 철저한 것 같다. 유교에서는 공자를 죽여본 적이  없지만 불교에서는 부처를 죽여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마귀가 오면 마귀를 죽이고"  이러한 사유가 불교에는 나타나지만 하지만 유교에서는 없다.

불교에서 "부처가 한 뼘 자라면 마귀도 한 뼘 자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부처가 한 뼘 자라면 마귀는 한 뼘 줄어야 되는 것이 아가? 이 말을 나는 아래와 같이 이해한다. 부처가 한 뼘 자란 것은 내가 한 뼘 발전한 것이며 마귀가 한 뼘 자란 것은 한 뼘 발전한 것에 안주해서 더 나아갈 마음을 가지지 않거나 한 뼘 발전한 것을 잘난 체하며 교만해지는 것이다. 안주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게 되며 교만해지면 발전은 고사하고 마에 빠지게 된다. 발전이 있을 때는 그것에 안주하거나 교만해지는 것을 점검하고 경계해야 한다. 안주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하며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깊게 느껴야 한다. 불교에서는 또한 악마가 나타나면 악마를 쳐부수고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쳐부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두 가지 예에서 보여주는 것이 주희에게는 부족한 것 같다.

옛날 경기고 터 옆에 있는 티벳 박물관이 간 적이 있었다. 박물관의 본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물관의 벽에 액자에 있는 시가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는 내용의 시였다. 이 시는 나의 깊은 곳 까지 들어왔다. 그 시가 계속해서 머리에 남아 있다가 성서에 나오는 막달리나를 떠올리게 하였다. 예수가 "죄 없는 자여 이 여인을 돌로 쳐라"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떠올랐다-예문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과거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울림이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깊은 곳에서 은근하고 알 듯 모를 듯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떠오른 연유를 살펴보았다. 근래의 나의 사유와 맥락이 같기 때문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는 것일 수 있음을, 인간의 내면에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죄가 있음을, 이러한 것들이 희미하게 느낀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악한 행위를 나 또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구하려고 한 것을 성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주자 역시 맹자의 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칸트는 그것은 한갓 짐승도 가질 수 있는 욕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이라는 책에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를 구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의 말을 하였다. 성서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막혀 죽을 때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을 아이를 구한 것에 적용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를 구하려고 한 행위를 자신이 모를 수도 있다. 예수의 말을 나의 모든 행위에 적용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고 행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이상하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누구 하나는 틀린 것이 된다. 하지만 논리에 따라서 틀린 사람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논리학의 기본이 되는 동일율과 모순율과 배증율은 여기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논리의 사유가 아닌 다른 사유를 펼쳐야 한다. 논리의 정합성이 아닌 각각의 말이 가지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맹자의 말은 나에게 느낌이 별로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다! . "그럴 수도 있지"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예수의 말은 충격을 주면서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아 있다. 아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른다니 이런 요상한 말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단지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무지와 악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의 위대함은 무지와 악을 통찰함에 있지 아니하고 무지와 악을 감추거나 거부하거나 비난하지 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무지와 악은 거부하고 비난할수록 강해지지만 따뜻하게 안아주면 무지와 악은 봄볕에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져서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 나 자신이나 타자가 나의 무지와 악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서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무지와 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지에 대한 자각은 나를 낮추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악한 사람임을 아는 것이다. 낮출 필요가 없이 이미 나는 낮은 존재이다. 즉 더럽고 추악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또는 너를 혐오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안아줄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무지와 악함에 대한 자각이 가능할 때 타자의 더러움과 악을 혐오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도대체 이해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저렇게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된다고 하지만 다른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미궁에 빠진 느낌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의 뜻을 이해해보자. 어머니는 자식의 똥냄새를 싫어하기는커녕 구수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의 똥냄새를 싫어한다. 아이의 똥냄새는 물리화학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냄새를 맡는 코가 서로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머니도 다른 사람의 똥냄새를 맡을 때는 싫어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른 사람들은 단지 똥냄새만을 맡은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똥냄새를 통해서 아이의 건강을 그리고 잘 자라고 있음을 본 것이다. 똥이 설사처럼 풀어져 나오면 어머니는 아이의 건강을 걱정해서 마음을 졸일 것이다. 아이의 똥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아이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다. 악을 대하는 마음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 악을 안쓰러워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다면 악을 싫어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에 사랑을 살아 숨 쉬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3. 나의 단점
주서백선을 읽으면서 나에게 부족한 점을 꼭 집어서 말한 대목이 있다. " 마음씀(用意)이 정밀하지 못하여 많기만을 탐내고 넓히기만 힘쓰거나 조금 성취하고 만족해 버리거나 한다면 밝힐 길이 없게 됩니다" "전에 선배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성격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면의 성찰에는 매우 깊이가 있고 타인에게 절실히 질문하면서도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서는 노력을 깊이 들이지 않아 종신토록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경계해야 할 것이고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인용한 두개의 글 모두 유자징에게 모낸 편지에 쓰여 있다. 나의 발전은 위와 같은 병통을 얼마나 제거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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