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뒷풀이는 재미있게 끝내셨나요.
끝까지 있었으면 했는데 못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_-
아무튼 3월부터 한 학기동안 교장선생님, 교무주임선생님, 두분 조교선생님, 반장님 그리고 고전학교 모든분들 다 같이 공부할 수 있어서 매우매우 반갑고 기뻤습니다.
사실 뭐 별 대단한 내용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도 어쩐지 발제 차례만 돌아오면 일주일 내내 골이 지끈지끈하고, 놀아도 머리 한 쪽에서는 걱정이 혹처럼 덜렁덜렁하고 그랬습니다. 게다가 매주 이어지는 대학암송의 압박감! 아윽윽-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진도 따라가다보니 완벽하게 암송은 못하더라도, 무심결에 심성구지 수부중 불원의를 떠올리거나,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 를 중얼중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 아이 기뻐. 히히.  걱정과 압박감의 세월이었지만 무사히 졸업에세이까지 발표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네요.

다들 많이 감사드리고, 다음학기에 또 뵙겠습니다!
여름 내내 건강하세요-



-----------------------------------------------------

강학원 고전학교 2기 기말 에세이
2006년 7월 19일
김주현


욕망하는 나, 주자학을 통한 욕망의 인정


비가 끝도 없이 내린다. 벌써 7월 중반이다. 아직 추위가 덜 풀렸던 3월 초, 나는 ‘고전’의 ‘고’자도 모르는 채로 고전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나는 당장 공부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고, 그래서 뭐든 꼭꼭 씹어 소화해내겠다는 의욕만이 앞섰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4개월간 대학을 외우고 근사록과 주서백선과 다산을 읽고, 일본의 성리학까지를 살폈다. 워낙에 모르는 공부라, 매주 새로운 것들을 배우니 작은 것에도 캬-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부딪히는 구절들-주로 노력의 중요성이나 공부법, 인간됨됨이에 대한 성찰 같은 것들-은 꼬박꼬박 수첩에 따로 적어 음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파편적인 훈계의 조각들이었고, 맥락을 짚어야 하는 어려운 개념들이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오면 “아직 때가 아닌가봐, 나중에 때가 되면 다시 나에게 와 닿겠지 뭐” 하면서 궁리하지 않고 나태하게 넘어갔다. 일단 이 넓은 주자학의 호수에 발이라도 담가 보았다는 것에 스스로 뿌듯해하며, 유럽 10개국을 보름 만에 끝내는 패키지 여행자 같이, 처삼촌 묘를 벌초하는 게으른 남편같이. 하여간 어느 덧 졸업할 시간이 다가왔고, 기말 에세이를 쓰고 있는 지금은 100%를 다하지 못한 일들의 마감에 즈음할 때면 늘 그러하듯이 좀 더 꼼꼼하게 텍스트를 읽지 못한 것, 좀 더 꼭꼭 씹어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욕망]
주자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다양했다. 새로움 앎이 주는 즐거움, 숨은 뜻을 해독하며 읽는 재미, 또는 이름만 알고 있던 죽은 사람들의 사상이 시간을 거슬러 살아나 나와 만나는 신선함 같은 것. 그리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은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일 뿐이었다는 깨달음 같은 것. 그러나 만물의 원리를 밝히는 도체편으로 시작해 자기 수양부터 정치, 교육, 성현에 이르기까지를 다루는 근사록이나 주자의 사상적 핵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편지글들을 읽으면서도 아무래도 내 눈에 가장 잘 들어왔던 부분은 내가 가진 궁금증에 대한 해답에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주는 부분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또는 나도 모르는 어떤 윤리관 속에 파묻혀 고쳐야만 할 점으로 죄책감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부분은 ‘나’와 ‘욕망’ 또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두 세 가지가 아니라 ‘나=욕망’ 즉 ‘욕망하는 나’라는 하나의 문제였고, 이 욕망의 문제를 계속 생각하다보니 ‘관계’의 문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사춘기적 고민과 방황이 다시 찾아온 듯한 일종의 공황상태였는데 (물론 지금도 고민은 끝이 없지만) 그러한 상태에 맞닥뜨려 당황하던 나는 이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야 적합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내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나에게 필요한 부분만이 강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다, 라는 결론에 가까워지던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인가, 또는 남들이 원하는 것을 모방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고보니 내가 내리는 판단의 근거가 순수한 나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 이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남에 의해 판단되는 나’가 어느덧 내 판단기준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판단할 때 1인칭의 나로 판단하지 않고 저기 높은 곳 쯤에 3인칭의 눈을 달아놓고는, 그 3인칭의 눈에 합당하게 보이는 ‘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세상이 욕망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수준의 욕망인지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큰 기업의 좋은 자리는 정말 내가 원해서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다 원하니 나도 같이 원하는 것인가.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그 것을 가진 나인가, 아니면 그 것을 가진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는 나인가, 였다. 또는 ‘나’라는 것이 어떤 최소한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떤 것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호, 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원하지 않는 욕망, 이 두 가지가 갖는 남들과의 차이점을 제거하고 나면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기호와 욕망의 덩어리일 뿐인가? 기호란 학습이나 반복노출을 통해 변할 수도 있고,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대체로 비슷한데, 이 기호에서 나는 어떤 차이점을 가질 수 있을까? 욕망은 늘 없애고 참아야할 대상으로 존재해 왔는데, 그렇다면 이 욕망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또는, 왜 나는 이렇게 어떤 남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하고, 남들과 나를 구분지어주는 특징이 사라지는 것을 겁내는가?

내 관심사는, 이러한 욕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것은 부정적/긍정적인 것인가, 혹은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다면 속에서 부대끼는 이 문제를 어떻게 컨트롤 해야할까, 또는 꼭 컨트롤해야 하는 걸까, 그냥 욕망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과연 그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절제를 미덕으로 교육받아 왔던 나에게 ‘욕망’은 이미 부정적인 언어였고, 그것은 없애야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책에서 ‘욕심’은 결핍에서 오고 ‘욕망’은 결핍의 부정에서 온다는 구절을 읽었다. 나에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니 결핍을 채우려고 손을 뻗는 소유욕이 욕심인데, 그렇다면 이 소유욕은 그것을 획득하는 순간 없어지게 된다. 이에 비해서 욕망은 나에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이 부정을 위해 수도 없이 내 안이 아닌 밖으로 눈을 돌려 어떤 타인/타자를 향해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욕심과 혼동될 수는 있지만 같지는 않다. 우주에서 행성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별에서 쏘는 광선이 저 먼 별에 닿고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나도 나라는 자각을 위해(욕망) 내 주변의 타인과의 거리와 형태(관계)를 파악하는 광선을 쏘고 싶었다. 주자학 공부시작 할 때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성리학에서는 마땅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리사욕을 죽이고 예를 따르는 것이 이 학문의 바탕이 아니었던가!

[성리학의 욕망]
성리학은 ‘나’가 극기복례하여 인仁에 이르러 성인이 되기를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克己하여 復禮하라고 가르친다. 예를 다하는 것은 體用적인 면인데, 理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으로 禮를 따라야 한다. 욕망을 자제하고 예를 따르며, 그 예로서 理에 이르러 居敬하는 것이 성리학의 목적이다. 그러면 천지만물이 생성소멸하는 원리를 깨닫게 되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조금도 치우침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신을 닦고 수련해야한다. 원래의 인간은 善한데, 이런 좋은 바탕이 가리워지고 탁해져서 사람과 사물간의 차이가 생기니 그 더러움을 없애는 노력이 수련인 것이다. 역시, 사리사욕은 많은 수련을 통해 없애야 하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공자도 나이 칠십에나 얻었다는 “마음 가는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욕망이란 없애야만 했던 것이다.

“성인은 태극의 온전한 본체를 갖추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에 가는 곳마다 중, 정, 인,의의 표준에 맞지 않음이 없다. 대개 수양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그러하다. 아직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덕성을 수양하는 것은 군자가 길한 까닭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여 거스르는 것은 소인이 흉한 까닭이다. 수양하고 거스르는 것은 또한 공경함과 방자함 사이에 있을 뿐이다. 공경하면 욕망이 적어져서 이치가 밝게 드러난다. 줄이고 또 줄여서 욕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면 고요할 때는 텅 비고 움직일 때는 곧게 되어 성인을 배울 수 있다” - 주희, [근사록] 제1권 도체편 81p.

그런데, 에세이를 쓰기 위해 다시 근사록을 처음부터 들추어 보다가, 나는 갑자기 도체편이야 말로 욕망의 덩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생생불식하는 역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욕망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맨 처음에 근사록을 읽었을 때 내 나름의 충격이었던 것은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우 거대한 어떤 실체가 있고 그 실체의 가르침 또는 원리에 따라 수양하는 방식에 익숙했던 나는 태극은 무극이라는 선언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실컷 높은 산을 오르려고 등산화에 비상식량까지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산이 아니라 평지였다는 느낌? 물론 그냥 평지라기엔 끝도 없이 넓은 평원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태극은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상태’와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정도의 수준까지만 이해하고 있다가, 다시 들쳐본 도체편은 이 움직임의 근저를 생각하다보니 또 새롭게 보였다. 모든 것이 바뀌고 움직이고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이 항상 움직이는 ‘상태’ 또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면 이런 움직임의 동력은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싸워야할 존재, 제거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하여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던 욕망이 사실은 세상의 근원이 아닐까? 그렇다면 갑자기 백날 연습하여 드디어 링에 오른 경기날, 싸우기로 한 상대가 기권해버리는 싱거운 결과인 건가 말이다.

“주돈이의 설은 [태극도설]이라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데, 이는 종래의 음양설과 오행설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편성한 것이다. 주돈이에 따르면 우주의 시원은 태극이라 불리는 혼돈스런 상태이나, 이 태극은 有인 동시에 無이므로 무극이라고도 불린다. 태극은 끝없이 회전하면서 음양을 낳는다. 그리고 이 음과 양이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과 결부되어 무수한 사물을 낳는다” -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과 사상] 제1장 주자학과 그 수용, 35p

양은 음을 만나고 음은 양을 만나 끊임없이 바뀌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끊임없이 소멸한다. 도체편의 핵심이 역동성이라고 할 때 이 역동의 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욕망이 아닐까. 음이 양을 원하고 양이 음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상태라면, 변화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내재하는데, 그 관계라는 것은 욕망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다른 것을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는 것이다.  내 몸을 수련하고자 하는 것은 내 욕망을 억눌러서 禮를 취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禮를 취하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기도 하다. 맘대로 행동하고, 비스듬히 앉고, 내킬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1차원적인 욕망을 조절하는 禮에 대한 욕망, 禮를 통해 敬에 이르고 싶은 욕망.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즉 낮은 수위의 욕망을 조절하는 높은 수위의 욕망. 그렇게 보자면 이러한 자연의 원리 뿐 아니라, 내가 修己하여 治人하는 것, 治國하여 平天下하는 것도 역시 욕망이다. 세계가 고정불변이라면 인간이 아무리 修己하더라도 治人은 커녕 내부의 심적갈등도 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기라는 마음의 욕망이 평천하라는 세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욕망과 구분되는 소유욕의 문제이다. 음이 양을 욕망할 때 그것은 음이 양을 가지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소유욕이 아니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역동성의 원리로서의 욕망은 그 생성과 소멸의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하거나 포함관계에 두지 않는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욕망하여 그것에 부딪히고, 그리하여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이고 존재적인 의미의 욕망이지, 소유하거나 포함하려는 욕심과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사리사욕이라고 부르고 수양을 통해 없애야할 것으로 파악했던 것은 이러한 물질적인 소유욕, 즉 움직이는 역동적인 실체로서가 아니라 ‘고정적인 나’ 속에 가두어두려는 ‘고정적인 대상’을 향한 욕심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역동성이 실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은 욕망인데, 욕망을 다스리는 욕망은 무엇인가,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이것이 세상과, 또는 또 다른 나와, 또는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서로 상생하는 건강한 욕망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도달한다. 이것에 대한 해답이 바로 理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극기복례를 통해 리에 이르는 것은 낮은 욕망을 높은 욕망으로서 제어하고, 그 방법을 수련하여 결과적으로는 천지만물의 욕망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갈등의 해소와 욕망의 인정]
찬찬히 조금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교과서들을 뜯어보면서, 나는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왔다 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갈등과 선후대소를 알 수 없게 엉크러진 욕망으로 얼룩진 상태를, ‘스스로 그러한’ 즉 자연적인 움직임의 상태로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강은 유유히 흐르며 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물이 늘 흐르고 있고 바람에 흔들리며 강바닥의 돌부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한 시도 같을 때가 없다. 그리하여 나도 늘 움직이고 늘 흔들리며 한 시도 같을 때가 없는 내 욕망의 상태를 그 상태 그 자체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역동적인 욕망, 즉 존재적인 욕망인가 아니면 단순히 더 우위를 누리고 싶어하고, 더 가지고 싶어하는 소유욕인가를 파악하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시간은 하루에도 수 십번씩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한 학기 동안 공부한 주자학 또는 유교의 법칙이 어떤 따르기 어려운 법칙 내지는 요원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나를 내 자체로서 인정하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방법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족하나마 한 학기를 공부한 주자학의 효용성은 그 넓은 평원을 샅샅이 둘러보지는 못했을지언정, 파편적이나마 교훈을 남겨주어 되새기게 하였다는 것, 또 갈등이 아닌  인정을 끌어내는 방법론으로 나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는 데에 있다.

  1. 학인 여러분, 무단결석한거 죄송합니다

    Date2006.09.25 By김승형 Views550
    Read More
  2. 수업불참 죄송합니다..

    Date2006.09.17 By윤호 Views312
    Read More
  3.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

    Date2006.09.15 By황청모 Views427
    Read More
  4. 고전학교 토요반 에세이

    Date2006.09.15 By정해남 Views378
    Read More
  5. 나는 왜 공부하는가

    Date2006.09.14 By이원범 Views321
    Read More
  6. 입학에세이

    Date2006.09.14 By김승형 Views258
    Read More
  7. 입학 에세이

    Date2006.09.13 By곽재연 Views410
    Read More
  8. 토요반 숙제 에세이_"자기소개 및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Date2006.09.13 By이경은 Views471
    Read More
  9. [고전학교3기]이지<분서1>권1 발제문.

    Date2006.09.13 By에움길 Views296
    Read More
  10. [토요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Date2006.09.08 By여희정 Views445
    Read More
  11. 토요반 자기소개서 올립니다.

    Date2006.09.03 By조윤호 Views433
    Read More
  12. 교재 안내 (고전-토요반)

    Date2006.09.03 By문리스 Views318
    Read More
  13. 고전학교 토요반 등록절차

    Date2006.08.22 By문리스 Views375
    Read More
  14. 고전학교 토요반 학인들께 알림(제1탄!)

    Date2006.08.22 By문리스 Views311
    Read More
  15. 기말에세이

    Date2006.07.27 By김진희 Views283
    Read More
  16. 졸업에세이-학문과 공공성/다산 발제문-원망과 인간관계

    Date2006.07.21 By이한정 Views371
    Read More
  17. 고전학교 졸업에세이 + 인사!

    Date2006.07.20 By김주현 Views574
    Read More
  18. 강학원 고전학교2기 졸업에세이.

    Date2006.07.19 By에움길 Views264
    Read More
  19. 고전학교 졸업에세이 초벌

    Date2006.07.18 By이경규 Views307
    Read More
  20. 졸업에세이

    Date2006.07.17 By김봉진 Views232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 172 173 174 175 176 177 178 179 Next
/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