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 1부에서 우리는 놀라운 청조의 세 황제  강희, 옹정, 건륭의 시대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보았습니다. 뭐 이런 황제가 다 있나,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청의 새로운 발견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아직도 토론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던 여러분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상업과 출판문화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강남의 지식공동체, 그들의 서고를 가득 채운 고문서들,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베이징의 유리창, 그리고 국가주도 거대 출판프로젝트였던 사고전서. 지독한 일벌레 옹정과 도대체 그 사고의 스케일을 가늠하기 어려운 건륭도 빼놓을 수 없겠죠. 참 한숨이 나오게 멋진 여행이었습니다. ^^

 청의 팔기군이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1644년이래, 청은 이 세 명의 황제가 다스린 134년의 힘으로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기까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제 우리는 찬란했던 세 황제의 시대를 지나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부서지고 밖으로는 중국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大타자, 서구 제국 열강과의 충돌로 깨져나가는 근대로 넘어갑니다. 어떤 사건과 인물 속에서 우리는 또 깊은 감동을 받고 또 깊은 한숨을 쉬게 될까요? 중국의 근대. 그 속에는 또한 우리의 근대가 있습니다. 아마 그들의 아수라장 속에서 우리는 또 우리의 아수라장을 만나겠죠. 

 자, 이제 새로운 여정을 향해 나아갑시다. 심호흡을 크게 하시고! 격동의 근대로 출발합니다!!


여기서 잠깐~

 지난 1부 옹정, 건륭의 시대를 여행하면서 여러분이 쓰셨던 공통과제 2편을 뽑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기억해 보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 전 쉬어간다는 의미에서요. ㅋㅋ 완전 제 개인적인 취향입니다요. 디스는 절대 사양!! (당첨되신 분은 아래 두 분~)

 

<1> 반역의 책 - 공가샘   

동사서독 공통과제. 김 태 욱. 2013.9.14


 반역의 책

  사건의 앞뒤를 재볼 겨를도 없이 빠른 속도로 읽어가다 보니, 짦은 시간에 중국의 강남 지역과 북경 일대를 숨 가쁘게 싸돌아다니다 돌아온 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삶의 호흡과 결은 물론이고 지형까지 몸에 새겨지고 스며든 듯한 느낌이 확 끼친다. 역시 ‘조너선 스펜스는 대가로군, 놀라워’하는 생각부터!

 ‘하찮은 서생’의 불장난 같은 소동에서 시작해 거대한 중국 사회를 한바탕 회오리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개인적, 국가적 참극으로 막을 내린, 소위 ‘쩡징 사건’.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인간사나 역사나 그 진상을 파헤쳐 가다보면 종국에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블랙코미디로 판명나고 만다는 것. 시골뜨기 선비의 몽상과 무지에서 비롯된 결정이 엄청난 파문을 불러오는 것서부터, 전 국민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의 지위에서 하루아침에 불온한 금서로 전락하고 마는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아이러니한 행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의 숨은 의도까지 헤아릴 도리는 없지만, 특정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이 책은 확실히 역사학자로서의 집필 목적이나 동기를 넘어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까지 넘겨짚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하긴, 과거의 행간을 더듬는 자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의 사회적 노릇이나 자리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참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주었는데,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 담론이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방식이나 경로와 관련해서는 우리 시대의 문제와 연동되면서 깊이 숙고해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중심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지배적인 담론이나 정보를 접할 수 없는 자들 사이에 떠도는 무수한 소문과 오해의 말들, 권력으로부턴 멀리 있지만 과거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의 권력 지형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던, 그래서 자기만의 신념을 갖고 있었던 자들의 언어들, 권력의 중심부에서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피지배층을 통제하고 교화해야 했던 자들이 만들어내고 퍼트린 담론들. 이것들이 자체 내에서 어떻게 새끼를 치고 또 서로 간에 관계를 맺어 한 시대의 말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책자체가 그 같은 말들이 웅성대는 시장이자 부딪치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 더. 중국 역사에서 청왕조가 갖는 위치나 성격의 문제에 대해. 아다시피 옹정을 비롯한 청 황제들은 애초부터 소수의 지배권력층으로서 다수의 피지배층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팔기라는 군사 행정적인 장치는 물론, 주접과 상유라는 유별난 방법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 이 책에서 확인했던 바와 같이 교통과 통신 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중국 영토의 실핏줄까지 훤히 꿰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무소부재의 권력. 그러고 보니,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작동될 수밖에 없는데, 청나라의 경우는 만주족이라는 소수의 민족 구성원이 지배층이다 보니 그토록 강고하면서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계급 지배가 아닌 민족 지배. 그런데 민족이란 계급보다 어쩌면 실체가 더 없는 것이니 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편,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이라는 전무후무한 책을 통해 자신에 대한 괴소문이나 비난을 잠재우고, ‘화’와 ‘이’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을 재조정하려고 했다. 이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었을 테지만, 그 의도와는 별개로 이같은 노력들이 다음을 준비하는 데 알게모르게 기여한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 사고전서 - 옥상샘


규문 동사서독 ∥ [사고전서](1)

2013년 9월 27일 최 정 옥


지식과 권력의 테피스트리, [사고전서四庫全書]

처음 [사고전서]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는 재미없으리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가면서 이외로 재미있었다. 아마도 이 제목의 원천은 저자인 켄트 가이가 주목하는 지점, 즉 “중화제국 내에서의 학자의 역할”을 탐구해가는 과정에 있었을 듯하다. 황제의 제의와 필요에 의한, 황제를 위한 서적수집이나 백과사전 출판이 아니라, 한족 지식인의 공부를 향한 욕망에서 발화된 [사고전서] 발행이라는 측면이 재미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학자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아니, 지식인의 역할은? 그리고 아마도 켄트 가이의 결론이자 전제이기도 한 지식과 권력의 결합에서 탄생한 하나의 결절점으로 존재하는 지식인의 삶의 존재 방식.

이 책에서 가이가 제시한 주균이라는 한 한족 지식인은 개인의 이름으로 드러났지만, 청대를 살았던 지식인들, 고증학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중국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삶으로 보여줬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지식인과 통치자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었던 부분은? 이들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한족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교적 이상 정치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청대에 등장한 고전문헌에 관한 연구, 즉 고증학이라고 부르는 학술 경향이 어떻게 정치적인 것과 관련을 맺을 수 있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지식인과 국가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과연 그러한가? 타협할 수 없는 모순보다 둘 간의 긴장관계는 어떤 식으로 극복되었는가?

우리가 부르는 전통적 ‘지식인’은 전통적으로 士 혹은 讀書人인 관료(정치가)인 동시에 학자였다. 송대에 나타난 ‘사대부’는 지식과 권력 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이름이다. 그런데 청대에도 과연 그랬을까? 만주족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권에 그들은 과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가? 그 엄청난 과거科擧시험의 바늘구멍을 어떻게 뚫고 들어갈 수 있는가?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독서인은 자신들의 지식인 전통을 버릴 수 있었을까?

켄트 가이에 의하면, 18세기 지식인들 사이에는 사회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공존했다고 한다. 하나는 조정에 출사하기, 다른 하나는 재야인사 되기. 전자의 지식인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현실정치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기, 말 그대로 관료를 말한다. 후자는 비판적 정신으로 무장한 학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정치인으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방기하지 않았다. 18세기 지식인들은 과거의 황금시대가 현재에 가치 있는 교훈을 가르쳐줄 것이라는 보편적인 중국인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과거로 통하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토대를 닦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고증학으로 지식인들을 이끌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복고復古=혁명/혁신의 사상.

하지만 지식인과 국가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관료와 학자 간의 간극도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다. 또한 같은 학자 관료라고 할지라도 그가 쥐고 있는 방법론적 틀, 가령 송학이나 한학의 간극 역시 청대 지식인의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켄트 가이는 이렇게 지식과 권력, 학자와 관료 및 황제와의 서로 다른 욕망의 테피스트리가 바로 [사고전서]라고 봤다. 짬뽕으로서의 [사고전서].

고증학의 발흥에는 만주족의 통치라는 정치적인 시대환경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지만, 유가가 발전해나가는 도중에 나타난 필연적 귀결(ㅠㅠ)이자 청대 학자들의 자의식적 긍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이때 어떤 유학자의 경우 주희의 격물은 문헌에 대한 공부로 이해되었고, 고전문헌 탐구는 자기 수양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물론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사상적인 요인 등 다양한 원인으로 고증학은 발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벤저민 엘먼. 지난 학기 우리가 읽었던 책 참고. 그런데 으악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이유는 흑흑.

 

건륭제는 왜 재위 30년이 지난 후에야 [사고전서]를 출판할 작정을 했는가.

아마도 황제 개인의 성격에서 기인할 것이라고, 즉 그가 갖는 지식욕이나 자부심 때문에 22년이 걸린 방대한 서적수집 작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온갖 것들에 관심이 많으신 건륭제, 이런 저런 분야에 능통하신 르네상스인 건륭제. 그는 文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한편으로 武를 사랑하고 무에도 능숙한 전사로서도 자신을 어필하고 싶어했다. 엄친아, 건륭제.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성격 외에도 ‘황제’라는 존재가 갖는 질문에서 그는 사고전서 출판 사업을 착수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홍타이지에서부터 건륭제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황제들의 고민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릴 것인가, 새롭게 창조된 청 제국을 영원토록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였다. 지난 학기 배운 바에 따르면, 이런 고민에서 주장된 것이 바로 “만주족의 법도”이다. 만주족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기. 이 이면에는 “한족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자리한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소? 혹은 한족 지식인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

건륭제의 고민도 이전의 황제들이 가졌던 고민과 다르지 않다. 강희제는 호탕한 성격과 호기심, 강건한 상무정신으로 한족을 눌렀다. 옹정제는 ‘쩡징사건’을 통해서 사상적으로 한족 지식인을 눌렀으며, 그의 아들 건륭제는 강희제와 옹정제의 장점을 이어받아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고 그 자신이 혹은 청 만주족의 성과를 세상에 공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고전서]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1771년 조서가 내려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켄트 가이(75)가 말하길, 건륭제는 자신의 회갑이 있는 1771년이 되자 200년을 넘긴 청조의 성공적 통치를 묵상하면서 청조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에 대한 개관과 함께 자신과 조상들이 문명화된 통치에 기여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황제 측의 욕망 이외에도 한족 지식인의 대두가 맞물리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최종선언을 하고자 하는 황제의 욕망에서 보자면, 모집된 책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통치의 방법을 천명하는 책”이라든가, “사회의 상황 및 인심과 관련된 책들”(76)이었다. 이것은 그가 통치를 함에 있어서 항상 (통치의) 선례를 과거의 글에서 찾았으며, 또한 자신은 나라를 경영하는데 붓에 의지했고, 원칙에 따라 통치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은 매일 공부에 매진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통치, 게다가 유가들이 말하는 덕치정치의 근간은, “사람들을 이끄는 원리를 얻고, 덕을 얻기 위해 과거의 말과 행동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77) 즉 책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황제의 욕망과 한족 지식인의 욕망은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황제의 입장은 학자들의 욕망과는 달라서, 세부적인 지점에서는 다르게 나타났다. 가령 어떤 책을 모을 것인가에 대해서 건륭제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유가사상의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는 중국의 학문전통의 대부분을 포함할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황제가 원한 것은 간단했다. “핵심적 기준은 효용성이었다.”(188) [총목제요]의 범례를 보면,


성현의 학문은 본질을 밝힘으로써 실용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했다. 실제의 일로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는 모든 작품은 쓸데없는 말에 불과하다.(188)


황제가 서적을 수집하는 목적은 학문 자체를 장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문이 가져다주는 통치 및 성현의 도에 관한 통찰력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그렇지만 아마도 필연적일 검열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황제가 주목한 지점은 학자들과는 달랐으니, 그는 어떤 글을 쓰느냐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대신, 문인들이 처한 상황이 정치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당파주의를 띠었느냐 등을 문제로 삼았다. 그는 한족의 ‘정치적 제스추어’를 단속했던 것이다. 황제는 [사고전서] 편집, 출판과 관련해서 책을 저술하는 집단, 책을 소유하는 집단 즉 한족 지식인과 자신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제도적 표현방식을 보여줬던 셈이다.

그러면 지식인의 입장은? 벤저민 엘먼에 따르면, 지식인의 정치적 기여는 이전과는 형태를 달리 했는데, 선언이 아니라 중국 사회 내에서 권력과 부의 중심지를 향해서 안정적으로 이동하는 경향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관료가 되지 않고도 정치가(관료) 되기를 이룬 것!?

예를 들어 보면, 황제가 책을 수집하라고 명령한 까닭은 책이 통치자와 재상들에게 필요한 식견을 갖고 있기 때문. 반면에 지식인은 서적이 소실될 위험이 있기에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영락대전]을 둘러싸고 황제는 명보다 뛰어난 청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사고전서]를 편찬하라고 했지만, 지식인은 [영락대전]을 읽고자 하는 욕망, 나아가 황실 도서관에 수장된 책들에 대한 접근성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같은 한족 지식인일지라도 관료의 입장과 학자의 입장은 달라서 검열과 왜곡, 나아가 분류상에서 차이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켄트 가이는 말과 행동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황제에게 말은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고, 관료에게 말은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학자에게 말은 행동을 설명하는 것(203)이다.


주균과 그의 학술 공동체

켄트 가이는 주균을 말하면서, 그로 대표되는 한족 지식인의 텍스트, 혹은 지식에 대한 열망을 말한다. 명나라 때의 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영락대전]을 보겠다는 열망, 탁본을 수집하고 분류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 아주 지난한 작업인 음운학, 소학, 박학 등. 18세기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 한 마디를 건넨다면 그건 바로 학술에 대한 그들의 깊은 정력이자 열망이다. 물론 이들이 한대 학술제도(훈고학으로 이야기되는?)를 연구하면서 새롭게 만들어 낸 고증학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미련퉁이 같은 짓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조금 징하다는 느낌.

하지만 이러한 열정은 지식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욕망을 내적 동력으로 갖고 또한 강력한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작동한다고 할 것이다. 즉 고증학자들은 고대문헌을 연구함으로써 자신들이 고대의 진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진실로 믿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학문에 대한 즐거움과 청대에는 또한 경제적 보상도 뒤따랐다고 하는데, 이것 외에도 유학자로서의 자기 의무를 완수했고 진리를 다시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그래서 세상에 두루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다. 우리도 그런가? 이런 질문을 가만히 던져본다.


 


  • 공가 2013.11.03 20:44

    난 왜 글쓰기 권한이 없는 거죠? 짤막한 후기라도 쓰고 싶은데, 올려지지가 않네요.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아주 개운하고 맑더이다. 간만에 느긋하고 편안한 휴일을 즐겼답니다. 어제는 일찍 나와야 해서 넘 죄송하고 아쉬웠구요... 다들 넘 고생하셨고, 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에세이를 쓰고 나면 늘 느끼는 거지만, 평소에 긴장감을 갖고 공부하고,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벼려두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더랍니다. 특히, 조별 토론 시간에 좀더 강도 높게 토론하고 생각의 깊이를 다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러려면 물론 텍스트를 더 치밀하게 읽고 준비를 해야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어제 에세이들을 함께 읽는 과정에서,  유학의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고 그 변화 과정까지 함께 살필 수 있어서 더없이 알찬 시간이었답니다. 물론, 더 깊이를 다지고 현재화해야 하는 과제가 남기는 했지만요. 그건 그렇고, 이제 '격동의 근대'로 접어들게 되면, 이 유학의  개념이나 사고틀과도 당분간은 이별인가요? 아님, 다시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건가? 그럴지도~~~ ^^; 암튼, 새로운 세상과 급격한  변화에 대해 자기식의 방식으로 대면하고 뚫고 가고자 했던 멋진 스승들과 그들의 사유를 만나게 되겠죠?  이 기대와 설렘들을 안고, 힘차게 20세기를 향해 가 보자구요~~~

  • jerry 2013.11.03 21:15

    쌤~! 글쓰기 권한 부여해드렸슴다.. 그리고 기대와 설렘을 안고 21세기를 향해가야 하지 않을까요? ㅋㅋㅋ

  • 효진 2013.11.04 13:50
    조장님 홧팅! 이번 에세이 때 공가샘 전과 다르게 개념에 충실하신 글 전 좋았습니다.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그날 정신줄 놓는 바람에 ... 전 샘 가시고 대차게 까였는데도 속시원한 이 기분은 뭔지...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ㅡㅡ 암튼 담번엔 두루뭉실 클라우드 같은 글 안쓰도록 조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전 아직도 춘추전국을 헤매고 있어 20세기는 어떨런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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