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허. 한숨만 나옵니다.

제리 샘께서 제게 막판에(그것도 '수업 끝' 소리에 모두 화색이 돌아 가방을 싸고 있던 순간에) 갑자기 공을 넘기실 줄이야. 사실 그 때까지, 제가 하게 될 줄 몰라서 제대로 안 듣고(채운샘 죄송;) 있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조모임 동안 나왔던 의문점들을 나열하면 되는 것인가, 까지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와 본 게시판에, 하동샘의 한 편의 완성된 소논문과 같은 논리적인 글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조모임 때 필기라도 할 걸 하고 후회막심했어요. 조모임 때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리 편안한 마음으로 넋 놓고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진 않았을 텐데.. 다음 주에도 하게 되는 거라면, 앞으로는 열심히 필기를 하겠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논리적인 글쓰기 말고,  저는 그냥 끄적이는 글쓰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혜경샘의 질문. 역경 읽기의 방법으로 '외우고 그림으로 그려보라'는 남회근 선생의 당부가 참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예를 들면 평지가 높은 산꼭대기에 펼쳐진 겸괘의 모습 같은 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어서, 지평선도 보기 힘든 우리나라에서, 특히 도심에서만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에서 대자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죠. 그리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외우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국민학교(!) 때 외웠던 구구단은 평생 기억에 남지만, 나이 들어서 무언가를 외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국은 우리의 어려움 - 맹자 외우기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던 기억이 남네요. 남할아버지 말씀처럼, 옆에서 선생님이 며칠 윽박지른다고 외워지는 나이는 이미 훌쩍 지나버렸다는 현실직시과,  또한 외워도 외워도 잊어버리는 우리의 숙명에 따라, 반복학습만이 살 길이라는 바람직한 결론으로... (결국 도로 돌아가는군요.)


그 다음 저(재원). 인간의 이분법과 가치판단이 낳은 권력구조와 경쟁으로 불행한 삶의 해결책이 상관적 사유, 양음의 조화와 변화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는 식의 이야기였는데, '인간의 삶도 자연의 '변'하고 '화'하는 변화무쌍함의 물결 속에 있으면 고정되거나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vs '과연 그런가'.  과연 이것이 해결책이 제시되고 노력해서 좋아지고,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즉 여기서 말하는 '성인의 자연스러운 도의 경지가, 우리가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가치판단해서 노력이라는 걸 하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닌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시비판단의 기준이 생기는 것, 그러니까 한 관점을 절대화하는 순간 이미 갇히는 것이라는 거죠.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인간의 기준으로 선해보이고 악해보이는 것이 선과 악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성인의 유희(가벼운 마음으로 점을 친다는 것)를, 젠더학에서 배운 풍자와 패러디를 연결해서, "차별이 난무한 세상에서 차별들의 코드를 슬며시 속으로 비웃으며"라고 표현한 데에서, '이미 비웃음 자체가 도를 잃어버린 상태다'.  '네 가 이미 옳은 자리에 서서 보다 못한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말이지.'. 내가 성인이고 도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도가 아닌 것이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어요. 화들짝 놀랐는데, 사실이었어요. 솔직히 겨우 1주 배우고 제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는 걸 인정합니다. 제가 남편에게 화를 내던 것을 참을 수 있었던 이유, 저는 소위 '맹자 배우는 여자'(아니, 전 배우는 정도가 아니라 '외우는' 여자이군요! 물론 세 줄 밖에 안했지만) 라는 자부심 때문이니까요. 이 자부심 자체가 제가 성인이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아무튼 겨우 1주차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  아니겠습니까. 흠흠.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도의 흐름대로 살 수 있느냐의 질문에, 에이 말도 안돼,  불가능해, 이거까지는 자연스럽거나 솔직한 반응이겠지요. 그렇다면 성인은 노력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의 질문과, 노력해서 될 수 없는 거라면 그건 지네들(몇몇 특출난 성인들) 얘긴데 그게 우리 범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이건 제 생각이지만) 아주 회의적인 잘문까지도 하게 되었어요. 제 발표 이후로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갑자기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이 일어났더랬죠)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그 다음 완수샘. 선생님이 하신 얘기들은 깊은 생각과 고민이 드러나 있어서, 전반적으로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누구처럼 논란이 불일 듯 화르륵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서경과 달리 스토리가 너무 보이지 않아서 정말 친해지기 힘든 책이라는 것(모두 고개를 깊이 끄덕였습니다.)과, 이어지고 끊어지는 작대기 몇 개로 세상을 나타낸다는 것, 특히 음양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음양의 조합이 산이 되고 바람이 되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음양도 잘 구분 못하는데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게 함을 도라고 한다' 같은 말은 더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인간인지라, 이분법을 습관적으로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의 어려움, 특히 스스로도 모르게 양이 음에 비해 더 나은 상태인 것 같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 특히 '내가 곧 음이고 양이다? 그럼 굳이 음과 양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천지사물은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알아서 변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지' 이 부분에 격한 공감이 되었어요.


제리샘. 음양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정반합이나 양음이 50:50의 비율로 존재하는 식이 아니라 음양의 계속적 움직임, 즉 평형된 상태가 아닌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 인간의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죽음이고 쇠락인 것 같지만, 그것이 음양의 균형이고 조화며, 이 과정의 반복과 변화 자체가 나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에서, 인간의 삶,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에 대한 성찰로 나아갔지요. 생로병사가 모두 당연한 운동 중에 있는 것이며, 한 생명이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롤 저절로 지극해 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운동을 인위적으로 단절시키거나 연장시키는 것을 우리는 선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리샘은, 서양의학이 그렇게 인간을 살려내고 낫게 하는 것에 그렇게 집중한다면, 사실 동양의학은 다른 방향, 즉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자기의 수명을 다하는 것을 옆에서 돕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동양의학이 서양의학과 같은 걸 욕심낼 필요가 있는가, 라고요. 안 좋은 신체를 예전처럼, 젊었을 때처럼 돌리려고 하는 게 바른 의학이 아닌 것 같다고, 늙음을 잘 받아들이고 겪어내도록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니겠느냐고 하셨는데, 동양의학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 저로서는 신선하고도 인상 깊은 통찰이었어요. 인간이 늙어감을 쇠락으로 보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새로운 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이라고. 매일매일 나의 몸이 달라지는 것은 늙음이라기 보다 새로워지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 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역발상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했고요.


그리고 수영샘. 굉장히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문학소녀의 싯구 같은 글에서, 주역 공부의 갈 길이 멀고 험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셨어요. 지극한 고요함이 움직이고 커지고 열려 만들어진 건곤의 아름다움과 그 아득함 앞에서는 놀라움과 감탄 같은 감성적인 반응을 하게 되지만, 막상  '역은 천지 사이에 작용하는 도'라는 말이라든가, '보이지 않는 도체는 작용의 측면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어려움이나 과제가 전부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목표는 높고도 멀지만 예를 실천하는 출발점은 제일 평범한 곳이어야 한다는 말에서는, 수영샘도 우리 모두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고요.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주역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전과 율법으로 지나간 실패들을 비추어대는 고질적인 습(習)' 에 걱정하신 것이 많이 공감이 됐어요. 자꾸 어딘가 발전해야 할 것 같고 어디론가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부담 내지는 의무감과,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실패감, 좌절감, 죄책감 같은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유 모를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습관적인 시간들이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닌 것 같아요. 공부를 하면서 점점 자유로워지기보다, '해야 한다'는 당위가 늘어가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나는 율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되뇌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유가의 논리보다, 내 안에 이미 도가 있다는 도가의 논리(사실 전 아직 주역이 유가 쪽에 가까운지 도가 쪽에 가까운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 도가의 논리라고 안하고 주역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냥 도가의 논리라고 썼어요. 정확히 아는 게 없어서 한마디가 조심스럽네요)가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그게 절 게으르게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공부하는 것이 오래 갈 수 있는 거겠죠. 분명 우리 모두는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그게 도의 자연스런 흐름이라면 우린 조금씩 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건가요.


두서 없이 줄줄, 말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공통과제를 대체 어떻게 쓰는 거냐고 잘 모르겠다고, 자기 감정을 쓰면 안 되는 거냐고, 도무지 자기한테 갇히지 말란 말이 감정을 쓰지 말란 얘기냐고 울부짖을 때, 혜경샘이 왜 그렇게 고민하냐고, 점수 받을 거냐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도 모르게, 높은 점수를 받는 것, 교수님(숙제를 내준 사람)의 취향을 파악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것 - 요렇게 얍삽(?)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윤차장님이 그냥 마음에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쓰라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쓰고 편안하게 하라고 하셨죠. 지금 그렇게 했거든요. 그럼 전 이번 주 공통과제는 안해도 되나요?  농담입니다. 그럼, 이만 조모임 후기를 마칠게요.



  • 람이 2015.03.24 16:36

    놀라운 후기입니다! ^-^ 차장조 분들이 나눈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전해지네요.  

  • 진섭 2015.03.24 16:45

    재원아, 필기도 안 했다면서 거의 동시녹음 수준인걸?

    윤정이 친구 아닌가벼^^

  • 윤차장 2015.03.24 18:00

    어헐~ 이거슨 이거슨!! 재원이가 동사서독의 재원으로 우뚝 솟는가!!  

  • 수영박 2015.03.24 18:20
    오- 안그래도 다른조 이야기도 궁금했는데- ㅎㅎ요렇게 들으니 또 좋군요^,^/!
  • jerry 2015.03.24 23:53

    뭐지? 필기도 안하고 이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다는걸 자랑질 하는건가? 그런건가? 

  • 윤재원 2015.03.25 00:02

    아앗. 필기 이전에 각자 내신 과제물들이 있어서 참고를.. 사실 중요한 얘기들을 빼먹은 게 훨씬 많은 거 같은데요;

  • 하동 2015.03.25 10:14

    공부에 대한 열정과 조원들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데요. 참신! 이 마음으로 앞으로도 쭈욱~~~. 내친 김에 대표 공지까지 하셔도 좋을 듯요.^^ 제가 계속 하니까, 뭔가 좀 묵은 내가 풍기는 듯도 하군요.

  • 채운 2015.03.25 14:19
    이런 노골적인 꼼수라니!! 하동샘 충분히 신선하시니까 되도 않는 소리 마시고요,(공지하청 엄금!!) 재원은 재원으로 우뚝 솟으리라는 차장님 말에 한 표!(근데, 지난번 침놀 때 보니까 윤정이랑 비슷해, 은근히 비슷해... 불길해....)
  • 윤재원 2015.03.26 14:58
    아아악!! 아니예요! 아니예요! 완전히 정반대예요!!
  • 백수영 2015.03.25 10:58

    ㅎㅎ 공통과제 써냈을 뿐인데 이런 힐링의 느낌이 ㅎㅎㅎ

  • 어머나 2015.03.25 21:05

    오오, 재원. 멋지구나 !!!

  • 윤재원 2015.03.26 15:00
    너 어쩔거얏. 너 때문에 내가 손해보는 게 너무 많은 거 같앗! 그냥 남으로 하고 들어올 걸! 생긴 게 비슷하다는 소리까지 듣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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