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욱쌤의 하청을 받아 제가 씁니다~_~
주역에서는 항상 새로 생겨나는 것을 중심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아무리 양이 충만해도, 조금이나마 음이 생성되고 있다면 음입니다. 원래 있던 상태보다는 변화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음에서 양이, 양에서 음이 생겨나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바로 근대 이전 동양의 에피스테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이후 이분법 체계에서는 음양이 서로 소통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음양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를 밀어내기만 하는 역의 세계에서는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상황은 수시로 변할 테니까요. 이번에 읽은 5장에서도 계속해서 상황은 변함에 주목하는 구절들이 옵니다. 역의 이치를 깨달은 군자란 자신의 현상태가 좋더라도 늘 망하는 것을, 어지러운 것을, 위태로움을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단순히 염려증과는 다릅니다-_- 이 좋은 게 계속되지 못할까봐 미리 애태우는 게 아닌 것. 좋은 상태도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무리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러다보니 오히려 그 상태를 더 잘 보존할 수 있는 자가 군자인 것입니다.
그럼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변화의 단서는 나에게 있습니다. 중용에서 말했듯이 하늘의 명을 본성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그 품부받는 것을, 나의 리듬을 파악하는 것이 1단계입니다. 거기서 출발해야 다른 사물의 리듬과 얽힐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운용할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라는 것을 '내가 지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맛집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게 '나'라고 할 수는 없지요. 몇년 전부터 맛집투어에 열올리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일 뿐. 그럼 나를 이루고 있는 조건은 어떻게 봐야 할지? 사실 나를 알 수 있는 틀이 없다보니 어떻게 자기 조건을 지혜롭게 쓸까 고민하는 다음 단계로 가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조건을 극복하고 더 큰 걸 이루려는 게 없습니다. 조건은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어찌보면 체제에 순응적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극복하고 발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금은 오히려 조건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것이 더 반체제적일 지도 모릅니다. 음...여기에 대해서는 더 생각이 필요한 것 같네요. 어쨌든 뭐든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군자가 지양하는, 계속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무리수를 두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리는 금물~_~/
다음주 공지!
중용: '도론'까지
중국사유: 2부1장 '시간과 공간', 2장 '음양', 4장 '도(道)'
읽어옵니다.
중용 발제는 재길샘.
중국사유 발제는 현옥샘.
간식은 수영샘, 영수샘.
다음주에 만나요/
뭔가 후기내용이 좀 띄엄띄엄하다잉?^^ 중간에세이가 없는 만큼, 모두들 여러번 읽으시고, 많이 생각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