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꽉 차게 놀았더니 정리가 늦었네요 ^^;;
2014.5.1 / 작작세미나 / D.H.로렌스, <미국고전문학연구> 6장 포
포는 인디언이나 자연에 관심이 없다. 그는 붉은 형제들(아메리카 원주민을 부르는 모욕적인 말인 레드 인디언을 가리킴 - 번역자 주)과 위그암(인디언들이 사는 원형천막집 또는 인디언마을을 가리킴 - 번역자 주)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정신이 해체되는 과정에만 관심을 쏟는다. 이미 말했듯이 미국 예술 활동의 리듬은 이중적이다.
(1) 낡은 의식을 해체하고 벗어던지기.
(2) 그 아래에 새로운 의식을 형성하기.
페니모어 쿠퍼의 글에서는 두 개의 진동이 함께 울린다. 포의 글에는 오직 한 가지, 해체적인 진동만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작가라기보다 과학자에 가깝다.
도덕주의자들은 항상 무력하게 포의 ‘병적인’ 이야기들이 왜 쓰여야만 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 이야기가 쓰여야 했던 이유는 낡은 것은 죽고 해체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낡은 백인 정신이 서서히 붕괴되어야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까지도 발가벗겨져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때론 끔찍한 과정이다.
포는 꽤나 쓰라린 운명을 타고났다. 해체되면서 매우 지속적인 경련으로 영혼이 부글부글 끓을 운명, 또 그 과정을 기록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경험 가운데 가장 혹독한 몇 가지 일을 이뤄냈을 때, 그로 인해서 비난받을 운명이었다. 이는 또한 필요한 일. 인간 영혼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영혼이 해체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하지만 포는 한 명의 예술가라기보다는 한 명의 과학자이다. 그는 과학자가 도가니에서 소금을 가려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가려낸다. 이것은 영혼과 의식의 화학적 분석에 가깝다. 반면 진정한 예술에는 항상 창조와 파괴라는 이중의 리듬이 흐른다.
바로 이 때문에 포는 그의 글을 ‘이야기’라고 불렀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그의 최고의 작품들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것은 분열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 영혼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더욱이, 그것은 ‘사랑’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