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미술을 말하다>(2) 폴 세잔, <세잔과의 대화>



세잔, 순간 속에 영원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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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폴 세잔, <소나무와 붉은 대지>, 1895. 색들의 변조. 세잔의 색들은 공간을 구성하는 능동적 에너지다.



1.“우리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자가 되어야 하네.” 

 

“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학습은 자연이라는 그림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베르나르에게, 1904년5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와 더불어 캔버스는 화가의 비좁은 아틀리에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인상주의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순간적 인상’이었다.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빛과 이 빛이 빚어내는 불규칙한 색채에 의해 사물의 윤곽은 깨지고, 형태는 해체된다. 빛으로 채색된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은 회화사의 빛나는 순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전시가 있은 지 불과 10년 후, 르느와르는 인상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며 고전주의 거장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갔고, 피사로는 과학을 통해 인상주의 화면의 허약함을 넘어가려 했던 신인상주의에 주목했다.

    그리고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그는 인상주의 화면에 ‘솜방망이’ 같은 비전 대신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경이적인 눈’을 가진 모네의 그림에 단단한 골격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그리하여 그는 생트-빅트와르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좋은 참고서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다양한 그림이야말로 실재하면서도 경탄을 금치 못할 연구대상입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에 이르고자 했다.

    투시도법에 의해 구축된 전통적 회화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변화를 제거한다. 이 경우 회화 평면은 하나의 점(소실점)을 중심으로 질서화됨으로써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통제하며, 회화의 모든 요소는 대상과 공간에 종속된다. 이와 반대로 인상주의의 캔버스는 모든 것이 변화인, 변화가 모든 것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빛과 대상은 해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화면은 해방되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잔상(殘像)들, 흔적들의 무덤이 되었다. 세잔은 이 모두를 넘어선다. 그에게 자연은 우선적으로 ‘진동’이며 ‘흐름’이다. 그러나 진동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순간들이 아니라, 순간 속에 새겨지는 우주적 힘이자 동일성을 생산하는 차이의 장(場)이다.

    그러나 이런 진동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화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과 견해들에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관습과 제도가 양산하는 온갖 클리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세계를 감각하는 ‘민감한 판’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삶 속에서 순간이 지나간다. 화가는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바로 그 순간’이 되어야만 클리셰가 아닌 리얼리티를 그릴 수 있다.


“미술가의 전체 목적은 침묵이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편견의 목소리들을 침묵시켜야 한다. 그는 잊어야, 잊어버려야 하며, 침묵해야 하고, 완전한 메아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완전한 풍경이 그의 존재의 민감한 판 위에 새겨질 것이다. 그런 연후에는, 자신의 재능을 캔버스 위에 그것을 고정시키고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서의 자연과 느껴지는 것으로서의 자연, 저기에 있는 자연과 여기에 있는 자연[근경과 원경] 모두는 半-인간적이고 半-신적인 삶을 지속하기 위해 융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삶이며, 원한다면... 신의 삶인 것이다.”



2.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걸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진정으로 풍경을 그리지 못했다.”


     세잔의 풍경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거기에는 뚜렷한 대상도, 정확한 공간감도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고집스러운 물질성이, 공기에 의해 소통하는 공간이 있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은 시간의 풍화(風化)를 견디며 진동한다!


“조금이라도 벌어진 틈새나 구멍이 있어서는 안 되지. 그렇게 되면 정서, 빛, 진실이 그리로 새어나가고 만다네. 난 캔버스 위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진행시키네. 그리고 동일한 동작,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캔버스 위에 흩어진 소재에 접근하지...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흩어지고 사라지지. 자연은 항상 동일하지만 그 외관은 늘 변한단 말일세. 그러니까 우리 예술가의 임무는, 모든 다양한 요소와 늘 바뀌는 외관과 더불어 자연의 영원성의 진동을 전달하는 것이네. 그림이란 모름지기 그 자연의 영원함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네... 난 자연이라는 쫙 벌어진 손가락들을 잡아서 흩어지지 못하게 꽉 잡아 묶지... 여기, 저기,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말이야. 그런 다음 색채와 색조와 음영을 선택해서 화면 위에 늘어놓고 연결해 나간다네... 그러면 그게 선이 되고, 바위나 나무 같은 대상이 되는 걸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그리고 양감과 색의 가치를 갖는데... 그러면 내 캔버스는 ‘깍지를 끼게’ 되지. 견고하게 말이야.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느슨해지면, 가령 너무 깊이 해석하거나, 어제의 생각과 모순되는 새 생각에 몰두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딴 생각을 하거나 내가 개입하면, 휙! 하고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린다네.”


    자연이라는 거대한 박물관 앞에서, 세잔은 겸허하게 ‘신체’라는 감각판을 연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풍경을 잘 그리기 위해... 두 원자가 만나는 그 날로, 두 회오리바람이, 두 화학적 춤이 결합되는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대지의 역사를 상상하고 그 세계를 호흡한다. 세잔이 말한, “경험에 흠뻑 적셔지는” 과정이 그것. 그러나 경험은 이내 흩어져버린다. 때문에 경험을 단단하게 붙들 수 있는 논리가, 감각을 조직할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화가의 눈, 그것은 보는 눈인 동시에 생각하는 눈이다. “눈의 가장 사소한 비틀거림이 전체를 망친다.” 그러므로 지금 스치는 순간적 인상에 휘둘리지 말고 풍경으로부터 ‘기하학적 구조’를, 사물들을 연결하는 뼈대를 구축하라! 그랬을 때 비로소 풍경은 인간에 대해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가 된다.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감각한다고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감각하는 행위는 관습과 개인의 습속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에 흠뻑 적셔지지’ 않는다. 혹은 경험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그 경험들을 하나의 논리로 추상화해내는 데 실패하고 만다. 전자는 관습에, 후자는 눈에 복종한 결과다. 그러나 세잔은 아카데미 화가들의 진부함과 싸우는 동시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망막주의’와 전투를 벌인다. 사물에 대한 직관적 앎에 도달하기 위한 오래고 악착같은 전투. 그 전투의 흔적이 바로 세잔의 풍경화다. 그의 풍경화들이 종종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전투가 너무도 치열했기 때문. 화면 곳곳의 여백은 그가 베인 상처이며 자연 앞에서의 멈칫거림이다.

    에밀 베르나르에 따르면, 세잔은 사전에 깊이 숙고하지 않은 붓질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투가 치열한 만큼, 붓질은 신중해야 했다. 단지 이미지들을 부수고 학대하고 변형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연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중하고엄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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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폴 세잔, <생 빅트와르 산>, 1899-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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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폴 세잔, <생 빅트와르 산>, 1904.



3. "색은 생물학적이다. 색은 살아 있으며, 색만이 사물들을 살아가게 할 수 있다."


    세잔은 수차례 ‘자연은 표면이 아니라 깊이’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연의 깊이를 실현하는 것은 원근법이나 명암이 아니라 색채들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공간은 거짓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원근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색조의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그에게 공간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색채의 관계를 통해 ‘생성되는’ 역동이다. 세잔은 색들을 뒤섞는 대신 순수색조의 밀고 당김, 수축과 팽창 운동을 통해 자연의 진동을 표현한다. 색은 홈패인 원근법적 공간을 채우는 수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공간화하는 에너지인 능동인 것이다. “우리는 세잔에게서 대상의 색을 바꾸는 것은 그 대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채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채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거, <입체파화가에 대하여>,1912)

    고전적 회화에서 색채는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으로 기능한다. 관계에 의해 강도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더와 덜이라는 명암의 가치에 종속되어 형태를 채우는 색채. 고전주의는 형태를 고수함으로써 사물의 리얼리티를 상실했다. 이에 반해, 인상주의는 색채에 기대어 형태를 파괴했지만 그 대신 사물의 단단한 물질성은 사라졌다. 형태냐 색채냐, 이것이 회화의 오랜 난제였다. 이에 대한 세잔의 해결책은 색채였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처럼 시각적 스펙트럼에 따라 색조를 분할하는 대신 색채적 뉘앙스의 점진적 변조modulation를 통해 색채감각에 뼈대를 부여한다. 생트 빅트와르의 으르렁거림, 외침, 열을 간직한 바위, 엎드린 그림자... 색은 자연의 약동하는 힘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것이다. 세계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화가는 색의 견지에서, 색의 논리를 통해, 문학적 코드와 서사적 관습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을 탐지하려는 내 모든 시도들과 왜곡들과 변환들은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나는, 예를 들면 태양이 재생될 수 없지만, 다른 수단들에 의해... 즉 색에 의해 재현되어야 함을 발견한 것에 만족했다. 나머지 것들, 즉 이론들, 드로잉들, 관념들, 심지어 감각들, 이 모든 것들은 우회로에 다름 아니다... 완전한 표현과 완전한 변환을 위한 하나의 길, 색이 있을 뿐이다. 색은 생물학적이다. 색은 살아있으며, 색만이 사물들을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예술적인 감각, 이 감각이야말로 부르주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반 고흐가 그랬듯이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화가’이고 싶어했던 세잔은 평범한 풍경과 사물들을 통해 기존의 시각적 관습을 전복시켰다. 가스케와의 대화를 비롯해 그가 동료화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인터뷰를 읽은 독자라면 바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이 일종의 수행(修行)이었음을. 세잔은 수행자와도 같이 세계를 호흡하고 감각하고 명상한다. 그에게 자연은 그야말로 거대한 화두였다.

    혹, 예술이 예술가의 자의식을 불태우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와 반대로,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불타는 자의식을 불어 끄고 아무런 목적도 욕망도 없는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고, 세잔은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은 지난하며 고독하다.  “40년의 악착같은 투쟁 끝에, 그는 마침내 어떤 사과 하나를 알 수 있었고, 한두 개의 꽃병을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성공적으로 한 모든 것이었다. 이것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는 씁쓸하게 죽었다.”(D.H.로렌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세잔, 그는 회화사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될 수 있었다. 세잔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또 '예술의 도(道)'를 배운다. “시도하고 실패하라. 괜찮으니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라.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이 더 낫다”(사무엘 베케트)


* 다음 <와글와글 미술>편은 "메를로-퐁티, 세잔의 사과를 사유하다"입니다.


  • 공가 2014.04.02 09:13
    이 아침에 전신을 강타당한 느낌! 목소리가 들리는 듯~~^^ 자, 우리 모두 '사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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