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자리’를 떠난 깨달음의 장은 없다

대혜종고, <서장(書狀) - 선 스승의 편지>

 

 

 

1. 사대부(士大夫)의 시대, 그리고 선(禪)

 

  당(唐)나라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다. 화엄종이나 천태종, 정토종, 선종 등 다양한 불교 유파가 흥기했고, 귀족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정치적,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도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였던 불교는 당나라 중후반 이후 완연히 중국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불교의 융성은 다양한 병폐들을 낳았고, 불교를 향한 비판과 탄압들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또한 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하는 불교로는 당말의 분열과 혼란을 바로 세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래저래 현실적 규정력과 추동력을 갖춘 유학이 강하게 요청된다. 사대부의 시대가 도래한 것.

  그렇다고 불교가 완전히 몰락해 버린 건 아니다. 실천적 교의를 가진 선종이나 정토종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특히 선불교는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단단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대에 새롭게 형성된 유학인 성리학은 그 성립 과정에서 이념적 ․ 실천적 자양분을 선불교로부터 빌려 올 수밖에 없었고, 불교 또한 사대부들의 현실적인 욕망과 처지를 무시하고는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선의 본령이랄 수 있는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은 인간적 관계나 세속적 잡무에 시달리면서도 고원한 정신적 경지를 갈구했던 사대부들의 입맛에도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성리학의 기초를 다지고 틀을 잡았던 주희 같은 유학자들조차 한 때 선 수행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런 시대에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는 육조 혜능(638-713) 이후 확립된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을 이어받아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수행법을 내놓는다. 간화선 운동을 통해 그는 북송(北宋) 시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대부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떠오르는 한편, 금나라의 침략 이후 남송 시기에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가 대립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17년에 걸친 긴 유배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간화선의 핵심은 일상 속에서 화두를 붙잡아들어 즉각적 깨달음을 이루는 데 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사제간의 즉문즉답인 선문답이 어려워진 시대에 ‘동정(動靜)’과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관통하는 간이직절(簡易直切)한 수행법은 사대부들에게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서장-선 스승의 편지」는 대혜와 사대부들이 나눈 교유의 기록이자,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스승의 절절한 노파심으로 가득찬 선 수행의 지침서이다.

 

 

2. 알음알이를 넘어서라

 

  ‘도(道)’가 무엇이냐는 제자 조주의 물음에 스승 남전은 ‘평상심’이라고 말한다. 평상심즉도(平常心卽道)! ‘물을 긷고 섶을 져 나르는’ 비근한 일상 속에 도는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기이한 신통력을 발휘한다든가 남다른 권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와 존재의 실상을 여여(如如)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생사에 대한 애착이나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부처라는 것. 이리되면 범부와 성인의 구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간명한 진리다. 그런데 왜 어려운가? 그것은 우리가 분별적인 지식체계를 갖고 세계와 존재를 인식하는 오랜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묻는 사대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혜가 줄곧 경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견(知見,알음알이)’이다. 이는 유무, 호오, 생사, 성속, 정동, 득실 등을 구분, 비교하려 드는 것으로, 대혜는 알음알이로 깨달음의 경지를 헤아리려는 것을 두고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드는 격이라고 일갈한다.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기존의 통념이나 고착화된 분별적 지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사대부 지식인들이야말로 이같은 병폐를 가장 씻어내기 힘든 사람들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적, 문화적 전통과 관습을 익히고, 나아가 이를 진리로 고착화시켜야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혜가 보기에 이들은 "일생동안 묵은 종이를 뚫되, 이 일(생사)을 알려고 하여 널리 글을 보며 현학적인 것을 말하고 널리 의론하고, 공자는 또 어떠하며 맹자는 또 어떠하며, 장자는 또 어떠하며 주역은 또 어떠하며 고금의 역사는 어떠한가" 하지만 결국 이 말들에 휘둘려서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지고 만다.

  지식이나 식견을 통해 도를 알고자 했던 세태를 두고 대혜가 벌였던 유명한 퍼포먼스가 있다. 당시에 역대 선사들의 선문답에 비평(頌古)을 덧붙인 책들이 다수 발간되는데, 원오 극근의 <벽암록>이나 무문 혜개의 <무문관> 등이 그것. 이같은 공안(公案) 비평집은 고아한 문학성으로 인해 당시 사대부 문인층에게 널리 호응을 얻게 된다. 하지만 공안집의 유행은 선사들이 남긴 죽은 언어(死句)에 대한 집착을 낳을 뿐 오히려 선의 핵심인 수행 주체의 자각성과 주체성의 발현을 가로막는다. 언어적 분별과 집착이야말로 선의 최대 적이 아니던가? 대혜 종고는 과감히 스승이 쓴 <벽암록>을 불태워버리는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

  물론, 대혜는 자신이 남긴 글이나 말 또한 ‘갈등’을 짓는 것이므로, 결코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라 누누이 못박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 없이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고, 견문각지로부터 도망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대혜가 그토록 문자에 얽매인 알음알이를 경계했던 것은, 고정된 인식을 넘어서는 자리에서야말로 참된 자유의 삶이 피어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곽암 십우도.jpg

 

 (그림)  송대 곽암이 그린 <십우도(十牛圖)>.  청정한 성품을 단박에 깨닫는 돈오의 과정을 그린 십우도는 간화선의 핵심을 반영한다.

 

 

3. 피할 수 없는 곳에서 공부하라

 

"편지를 받아보니, 지난 번 저의 편지를 본 뒤부터 매번 시끄러운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항상 점검하고 있으나, 공부에 힘을 붙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피할 수 없는 곳이 문득 공부를 마친 자리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서 점검하면, 또한 도리어 멀어질 것입니다. 옛날 위부의 노화엄이 말하기를 “불법이 일상 생활하는 곳과 행주좌와하는 곳과 차 마시고 밥 먹는 곳과 서로 묻는 곳과 작용하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않게 됩니다. 정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점검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대혜 당시에는 묵조선(黙照禪)이 널리 유행했다. 묵조선이란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를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쉬는 것을 강조하는 선의 한 조류다. 이런 묵조선은 일상적 잡무나 세속적 욕망의 한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혜가 쓴 편지의 대부분은 이같은 묵조선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혜가 보기에 묵조선은 선의 본래 면모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선은 지금 내가 선 일상의 자리에서 이 마음의 ‘본래성불’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인데, 별도의 ‘고요한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며 쉬는 것’, 즉 본래의 마음 밖에 또 다른 마음을 상정하는 꼴이다. 이야말로 수미산만큼이나 큰, 벗어나기 힘든 병통인 것이다.

  결국, 시끄럽고 피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자리이자 공부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아니, 고요하고 시끄럽고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분별이고 헤아림이다. 우리는 밥 먹고 차 마시고 일하고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구비와 길목마다에서 존재의 완성과 자기 구원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굳이 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상 이는 자명하다. 적막처에서 혼자 아무리 많은 생각과 결심을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숱하지 않던가.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를 떠나 달리 깨달음의 장은 없다! 고로 사대부 의식에 들러붙은 때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사대부 생활을 그만둘 필요가 없다. 녹봉을 바라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벼슬살이의 괴로움이나 자식들로 인한 고통과 슬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처자를 버리고 관직에서 물러나 육신을 괴롭히고 정신을 침잠시킨 다음 고선귀굴 속에서 망상을 짓고는 이를 두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일상의 삶 위에서 일상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선불교와 대혜의 가르침이 성리학의 수양론으로 직결되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직절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같은 심오한 통찰 덕분이리라.

 

 

4. 스승, 그 모순의 자리를 생각하다

 

"한 평생이 능히 얼마나 됩니까? 생각 생각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좋은 일 하는 것도 오히려 판단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생각 생각이 번뇌 가운데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는 일이겠습니까?"

"모든 부처와 모든 조사가 아울러 한 법도 사람들에게 준 것이 없고, 다만 본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믿고 스스로 긍정하며, 스스로 보며 스스로 깨닫게 했을 뿐입니다. 만약 남의 입에서 나온 말을 취해 온다면 사람을 그르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선, 스승, 그리고 편지라니. 힐링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넘쳐나는 불안의 시대에 이 얼마나 그럴 듯한 단어들의 조합인가? 확실히 이 시대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멘토를 찾는 사람들이 많고, 멘토임을 자처하는 자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상품소비를 통해 삶의 공허를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공허감은 더 커지듯이, 누군가를 찾아 의존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문제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해진다. 생사와 관련된 근본 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자본이 부과하는 허다한 질곡들에 맞서는 힘은 결국 자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부처의 말이든 조사의 가르침이든, 모두 강을 건너는 뗏목이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이다. 대혜 종고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듯한’ 치열한 공부의 힘으로 스스로 증득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될 때까지 남에게 묻거나 의지하지 말라고 한다. 그의 가르침엔 그럴듯한 위로나 친절한 안내는 없을 뿐더러, 스승의 자리마저 곧장 저만치 물러나 버린다. 백척간두의 꼭대기 위로 제자를 몰아세워놓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 스승!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러한 스승이다.

 

 

 

 

    

  • 공가 2014.03.17 16:26
    많이 모자란 글, 다듬고 편집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 다음엔 잘 써서 올릴게요.
  • 제리 2014.03.18 13:54
    뭐 이런 겸사까지... 반성문에 겸손함까지 갖춘 우리의 전문학인! ㅋㅋ
  • 혜원 2014.03.17 16:49
    드디어 올라왔군요 공가쌤의 와글와글!!^0^
    일상이 공부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와 닿으면서도 정말 어려운거 같아요ㅠㅠ 계속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거 같다는...ㅠㅠ
    다음 와글와글도 기대할게요~
  • 태람 2014.03.17 17:07
    전문학인으로 거듭나신 공가쌤! 글 잘 읽었습니다. ^^
  • 윤차장 2014.03.17 17:16

    기다리고 있었슴다~~ ^^ 스승, 그 모순의 자리, 조금의 곁도 주지 않는 스승이라니...대혜종고의 일갈이 들리는 듯 합니다! 다음 글도 약속하셨다는 소릴 들었슴다. 곧 올라오길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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