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친구들을 소개합니다(미.친.소)>(1) 앙또냉 아르또,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예술, 문명의 안녕을 근심하다




                                    untitled.png 만 레이가 찍은 아르또, 1926       

       

                   

1. 아르또, 반 고흐의 죽음을 되묻다


  사후의 영광이 망자(亡者)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살아서 꾸준히 외면당한 반 고흐는 사후, 그리스도처럼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시는 매번 성황을 이뤘고 그에 대한 많은 비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중에는 앙또냉 아르또의 비평도 있다. 연출가이자 배우이며, <연극과 그 분신>을 비롯한 여러 저작들의 저자. 아벨 강스의 영화 <나폴레옹>을 본 이라면 마라 역을 맡은 배우로 기억하겠고,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에서도 수도승 마시웨로 분한 아르또를 만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들뢰즈와 가따리는 아르또의 개념 하나를 ‘훔쳐다가’ 그들만의 용법을 고안했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기상천외한 개념이 바로 그것. 광기와 글쓰기의 문제에 골몰했던 미셸 푸코의 초기 텍스트에서도 우리는 곳곳에서 아르또의 출현을 목격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반 고흐에 대한 비평,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다.(우리나라에서는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47년 1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반 고흐 전시회가 열린다. 당시 <예술>이라는 주간지에 한 정신과의사가 출간한 책이 소개되었는데,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반 고흐의 광기를 분석한 <반 고흐의 악마성>이라는 책이 그것. 반 고흐의 비일관되고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광기로 규정하고 그의 작품을 질병의 결과로 단정지은 책의 내용을 접한 아르또는 이에 분개하여 단숨에 비평문을 써내려갔다. 단숨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차례의 퇴고를 거친 끝에 탄생한 이 비평은 1947년 12월 15일에 출간되어 생트 뵈브 비평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3월, 아르또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앙또냉 아르또(Antonin Artaut,1896-1948). 10대 후반 뇌막염을 앓은 후로 우울증과 신경질환에 시달렸고, 멕시코에서 타라후마라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며, 발작을 일으킨 끝에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상성’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그 역시 반 고흐처럼 ‘비정상적’ 정신상태를 지닌 ‘환자’였고, 그러니 그의 비평을 두고 같은 처지에 놓인 예술가의 동병상련 내지는 광기어린 변호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아르또 역시 자신의 광기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 사람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광기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나는 지금 지독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유로부터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버림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유하는 일에서부터 단어로 물질화된 외부 사실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단어, 문장의 형태, 사유의 내적 지향, 정신의 단순한 반응, 이 모두에 대해 나는 나의 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한 것일지언정, 내가 하나의 형태를 포착하는 순간, 혹시 다른 모든 사유가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그것을 잡습니다.” (자크 리비에르에게 보낸 편지) 


  자신의 광기를 투시하는 날카롭고도 신중한 의식. 아르또의 글을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 두 사람을 공명시키는 것이 동일한 질병이 아니라 바로 그 베일 듯한 엄격함임을, 상식과 문명의 질병을 징후적으로 포착해내는 지독한 감수성임을. 무엇보다도, 그들의 예술이 혼돈스런 광기의 폭발이 아니라 엄격하게 통제된 감각의 직조물임을. 아르또는 광기와 질병과 예술을 등치시키는 세상의 상식에 맞서 묻는다. 반 고흐의 회화는 광기의 산물인가? 그의 자살은 광기의 필연적 귀결이었는가? 우리가 예술가의 ‘광기’라고 규정하는 것, 그것은 사회를 위협하는 악(惡)인가?



2. 언어를 짓이긴 아르또, 사물을 파헤친 반 고흐


 “나는 오래 전부터 순수한 선의 회화에 열광했는데, 어느 날 선이나 형태들이 아닌,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온통 격동하듯 그린 반 고흐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격동은 멈추어 있다. 마치 다들 알아듣기 힘든 말로 이야기하는, 그리고 온 세상과 오늘날의 삶이 온통 밝히려고 매달린 이후부터 더욱 모호하게 된 저 꿈쩍하지 않는 힘의 무지막지한 저돌성에 몰매를 맞고 있는 듯 멈추어 있다. 바로 그 몽둥이질, 진짜 그의 몽둥이질로 반 고흐는 자연과 오브제의 모든 형태를 쉬지 않고 때린다. 반 고흐라는 대못으로 꽁꽁 엉겼던 올이 펴진 풍경들은 찢겨진 복부 사이로 역정을 내며 자신의 적대적인 살덩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이 풍경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르또가 반 고흐의 풍경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관습적인 지각과 감각을 불허하는, 찢겨지고 파헤쳐진 자연의 속살들. 반 고흐 이전의 인상주의 풍경화는 눈에 보이는 순간을 빠르게 화폭에 옮겨낸 ‘망막적’ 풍경이었다. 그것은 거친 듯하지만 한없이 온순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반 고흐라는 사내가 돌연 이 온순한 풍경을 파헤쳐 사물들의 내장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것은 외부의 풍경도, 반 고흐의 내면도 아닌, 변용된 신체성이었다. 비평가와 대중들은 그를 손가락질했다. 제 정신이 아니군!

  아르또의 연극과 글은 반 고흐의 화폭을 닮았다. 그는 연극의 전형적인 스토리 진행과 갈등구조를 해체했고, 비관습적인 몸짓과 소리, 무대장치를 통해 날것의 감각을 생산하는 극을 실험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잔혹극’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가 말한 ‘잔혹성’은 피가 난무하고 살점이 튀는 ‘재현된 잔혹함’과는 무관하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변용의 작용들은 모두 잔혹하다. 중심을 빼앗아 안정된 지반을 흔들고, 익숙한 의미작용을 부수기 때문이다. 아르또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를 실험한다. 하나는 기관들로 조직된 유기체(‘인간’)를 파열시켜 생생한 육체성을 드러내려는 시도요, 또 다른 하나는 관습적 의미작용 체계에 종속된 분절적 언어를 분쇄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전자가 제도화된 몸과 관습적 제스처, 의미화된 인간의 육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후자는 중성적이고 문자중심적이며 표상적인 인간의 사유구조를 해체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아르또의 연극은 관객과 배우의 관습화된 감각을 일깨우고, 개체성을 붕괴시키며, ‘기원 없는’ 사유를 생산한다. 말 그대로, 잔혹하다. 그러나 이러한 잔혹성은 극도의 엄밀함을 동반하지 않으면 무기력함 혹은 단순한 폭력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잔혹성은 무엇보다도 명석성이며, 그것은 일종의 엄격한 지침이고 필요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의식이 없다면 잔혹성도 없다.” 아르또가 반 고흐의 회화에서 본 것, 그 자신이 평생 실험한 바로 그 ‘잔혹성’이었다.


 “정말로 당신이 그의 이 짤막한 편지에서처럼 간단하게, 무뚝뚝하게, 객관적으로, 지속적으로, 탁월하게, 탄탄하게, 뭔지 모를 듯, 묵직하게, 진정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림을 묘사할 수 있는가. (…) 나는 반 고흐가 자연을 다시 모으고, 자연에 다시 땀을 솟게 하여 땀이 흐르게 했고, 또한 자연의 모든 요소를 백 년 동안 절차탁마한 것, 생략부호, 빗금, 쉼표, 그리고 횡선들의 근본적이고 막강한 압력을 온갖 색채의 기념비들처럼 그림 위에 다발로 떼지어 분출시켰기 때문에 화가라는 점, 그리하여 우리는 반 고흐 이후 다시는 자연의 온갖 모습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을 수 없음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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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부분(1890) / "반 고흐는 자살한 자기 비장의 새까만 세균덩어리인 양 까마귀 떼를 풀어놓았다.... 검은 흉자국 같은 터치를 통해, 까마귀들의 수북한 깃털의 날갯짓으로, 대지의 폭풍이 혼류하는 것을, 저 높은 곳의 권위로 짓누르려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 전체는 풍요롭다. 풍요로우면서도 호화롭고, 고요한 그림이다."



3. 예술, 회귀하는 유령들


  “신에게 인류는 으레 자신의 비열함을 바친 것밖에는 없다. 인류는 현실을 구성하는 온갖 힘들의 자연스러운 부대낌 속에서 살아보려는 노력도, 그 속으로 진입해보려는 노력도 원치 않기 때문에 그 어떤 폭풍우도 무너뜨리지 못할 육체를 현실로부터 끌어내지 않는다. 인류는 항상 그저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는 쪽을 훨씬 사랑했다. 생명은 습관적으로 예술가의 천분 속으로 생명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한 손을 그을린 반 고흐는 살기 위해, 즉 존재한다는 관념으로 산다는 사실을 벗어던지기 위해 결코 투쟁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려는 노력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광인 반 고흐처럼 번쩍이고 번득이려고 애쓰지 않고서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사회가 그로부터 앗아간 것이다... 반 고흐 왕은 자신의 건강의 분출을 알려줄 경보를 품에 안은 채 영원히 잠들었다. 경보는 어떻게 울리는가? 즉, 좋은 건강이라는 닳고 닳은 병의 넘쳐남으로, 살려는 엄청난 열정의 넘쳐남으로, 썩은 백 개의 상처로, 또한 어쨌든 살려야 하고, 영원히 살게 해야 된다는 의지로 경보를 울린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만일 아르또가 20세기의 사유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의 작품은 틀림없이 우리를 현기증 나게 할 만한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문제란 무엇인가. “왜 비이성이라는 차이를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즉, 왜 비이성은 늘 감성적인 것의 망상 속에 갇히고 ‘광기’라는 판결 속에 유폐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이성’을 검증하려 시도한 이들을 단죄하는 그 권력은 무엇일까, 하는 것. 아르또가 줄기차게 제기했던 문제, 그건 현대가 상실한 혹은 제거한, “광기에 대한 비극적 체험”이었다는 게 푸코의 주장이다. 실제로, 아르또가 반 고흐의 죽음을 두고 ‘사회가 자살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반 고흐는 먼저, 조카의 출생을 알려준 동생에 의해 이 세상으로부터 내몰렸고, 다음으로, 반 고흐가 오히려 잠이나 청하러 갔으면 좋았을, 몸상태가 좋았던 어느 날, 휴식과 고독을 권하는 대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면 된다고 그를 내보냈던 가셰 의사로부터 이 세상에서 내몰렸다. <아르또씨, 헛소리를 하시는군요.> 이제껏 내가 수없이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반 고흐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에 목이 조이고, 피가 엉기어 죽었다.”


  오베르 쉬아즈의 정신과 의사 가셰는 반 고흐에게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있는 대상을 그대로 그리라고. 동생 테오 역시 물질적으로는 도움을 주었지만 ‘정상성’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형의 광기를 진정시키려고만 했을 뿐, 반 고흐가 천착했던 지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르또는 이 ‘정상성의 권력’을 향해 반문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라고,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병을 정확하게 감지한 의사였으며, 그의 그림은 폭발하는 건강성이었다고. “그는 평생토록 단 한 번 손을 그을렸고, 남은 인생동안 단 한번 왼쪽 귀를 자른 것밖에는” 없지만, “오늘 우리는 매일, 여성의 성기를 구워 푸른 소스에 발라 먹거나 혹은 엄마의 자궁에서 이제 막 나온, 볼기에 손자국이 채 가시지도 않은 파르르 떠는 신생아의 성기를 먹는 세상에” 살지 않는냐고. 비정상적인 것은 반 고흐가 아니라 세상 아니냐고. 결백을 입증해야 하는 것은 반 고흐의 광기가 아니라 ‘문명’과 ‘합리성’이라는 명목 하에 폭력을 행사하는 이 세상이 아니냐고.

분명, 광기가 예술의 원인은 아니다. ‘정상성’이라는 척도를 해체하기 위해 우리 모두 미쳐야 하는 건 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기’  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어떤 ‘비이성’ 혹은 ‘비정상성’이 어쩌면 합리성으로 무장한 우리 문명이 앓고 있는 질병의 징후는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정상성이라는 ‘신적 권력’으로 모든 차이들을 심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예술이란 결국 그 권력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끊임없이 회귀하는 유령들이 아닐까.


 “소용돌이치면서 평화로운, 부들부들 떨면서 진정된 반 고흐의 아름다운 풍경화들을 조심하시라. 그것은 곧 사라질 고열이 다시금 발열하기까지 누렸던 건강이고, 좋은 건강의 분출이 다시금 분출하기까지 일어났던 발열이다. 어느 날, 열정과 좋은 건강으로 무장한 반 고흐의 회화는 그가 가슴 속에 더 이상 지닐 수 없었던 갇힌 세상의 먼지를 허공에 흩날리기 위해 다시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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