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列子』, 분별적 사유에 대한 환상적 조롱


1. B급 아웃사이더의 물음


“열자는 아직 참된 학문을 하지 못함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3년 동안 나가지 않고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기르기를 사람 먹이듯이 하여 세상 일에 좋고 싫음이 없어졌다. 허식을 깎아 버리고 본래의 소박함으로 돌아가 무심히 독립해 있으면서 갖가지 일이 일어나도 얽매이지 않았다. 오로지 이와 같이 하여 일생을 마쳤다.” (『장자』, 「응제왕」)


『장자』에 기록된 에피소드는 학문을 배우러 갔던 열자에게 생긴 어떤 결정적 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참된 학문은 못다하고 돌아왔지만 무심한 듯 이름 없이,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조용한 삶을 살았던 열자. 크게 자기 학설을 떠들지 않았으니 제후들에게 유세할 일도 없었을 테고,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말씀”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고, 그나마 거의 멸실될 뻔한 것을 위진魏晉시대 장잠張湛이 영가지란永嘉之亂(308~313)을 피해 강남으로 피난 갔을 때 여기저기서 구해 모아 주석을 붙여 세상에 전했다. 그리하여 빛을 보게 된 책이 『열자列子』다. 

열자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아웃사이더다. 열자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열자』라는 책 자체의 진위가 의문시되다 보니 텍스트의 권위도 그다지 높지 않다. 『열자』의 전반적인 내용이 허虛를 중시하는 내용이 많아 노자, 장자와 함께 도가 계열로 분류될 뿐이다. 하지만 『열자』에는 당대 어느 제자백가의 책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의사도 고치지 못한 병을 낫게 한 떠돌이 도인, 내장 기관까지 사람과 똑 같은 자동인형을 만드는 공인,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불확실한 이야기, 동서남북으로 끝없이 갔을 때 도달하는 미지의 나라 이야기, 우리와 전혀 다른 풍습을 가진 나라에 대한 기록 등 차마 “지식”이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한데 엮어 놓았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의가 이름없는 농부, 나무꾼, 유랑민들이다. 명망가들이 등장하더라도 자신의 지식을 뽐내다 망신만 당한다. 

『열자』는 평생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 없이 조용히 살다 사라졌을 수도 있는 열자를 앞세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기적적으로 회생시켰다. 그래서 정교한 형이상학이나 체계적인 논리는 없어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경험과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열자』는 법과 윤리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명분과 신념을 되묻는다. 당신, 행복하십니까?


2. 군자삼락 vs 열자삼락 


  이런 얘기가 있다. 공자가 태산에 놀러갔다가 영계기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사슴 가죽옷에 새끼로 띠를 두른 채 금琴을 타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이에 공자는 묻는다 “선생께서 즐거워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계기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게는 즐거움이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있어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한 것인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입니다. 남녀의 구별에 있어서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천하므로 남자가 귀한 것인데, 나는 이미 남자가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입니다. 사람은 나서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포대기에 싸인 처지를 면해 보지도 못하는 자가 있는데, 나는 이미 나이 구십 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셋째 즐거움입니다. (중략) 가난함이란 선비로서는 정상적인 것이고 죽음이란 인생의 끝장입니다. 정상적인 처지에 있다가 끝장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영계기가 삶을 누리는 데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다. 자신이 처한 상태 그대로 만족하니 즐겁다. 아마 그가 눈이 멀었다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 즐겁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맹자도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을 말한다. 그것은 “첫째, 부모 모두 생존하시고 형제 별탈 없음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둘째, 우러러 하늘과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음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이다. 이처럼 유가들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적 존재성을 획득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 그 정점에 “천하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모두 기뻐한 후에야 기뻐한다(先憂後樂)”는 태도가 있다. 자신의 기쁨을 천하와 공유한 후에야 기뻐하는 유가들은 “남도 나와 같을 것” 이라는 전제 하에 자신의 도를 펼친다. 그들은 세상일에 관여치 않고 자족하는 사람들을 아직 “미흡한” 자들이라 낙인 찍는다. 그러나 타인의 욕망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옳음”으로 천하를 교화하려는 이들의 “선의”가 어쩌면 더 폭력적일 수 있지 않을까? 

영계기의 즐거움에는 척도가 없다. 자신의 척도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는 입신양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그럼으로써 『열자』는 인의예지로 세상을 교화하여 만인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유가의 이상이 사실은 천하 위에 군림하려는 야망일 수도 있음을 폭로한다. 그리고 묻는다. 타인을 복종시키지 않고도, 명예도 없이,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서도 즐거움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3. 분별을 떠남으로써 누리는 지복至福 


『열자』가 전하는 ‘잘 사는 법’은 어쩌면 간단하다. 헛된 명예를 다투느라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너의 즐거움을 만끽하라! 그런데 이런 웰빙(well-being)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분별이다. 이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鄭나라 재상인 정자산鄭子産은 나라 정치를 도맡아 잘 다스렸으므로 착한 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악한 이들은 그가 내린 법을 두려워했으며 제후들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런 그에게 형과 아우가 있었는데 그들은 자산과 달리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세상일에 무관한 듯 살았다. 자산은 형제들을 찾아가 이렇게 충고한다.


“사람이 새나 짐승보다도 귀한 까닭은 지혜와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생각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예의입니다.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 사회적 명성과 지위가 돌아옵니다…(중략) 형님과 아우가 저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아침에 스스로 뉘우치는 대로 저녁이면 벼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쯤 되면 방탕한 생활을 접고 눈물 흘리면서 뉘우칠 거라 생각했겠지만, 자산의 형과 아우는 뜻밖의 말을 한다.


“무릇 삶이란 타고 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죽음이란 이르기 쉬운 것입니다. 타고 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이르기 쉬운 죽음을 기다리는 마당이니, 우리 모두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은 예의를 존중함으로써 남에게 뽐내고 감정과 본성으로부터 어긋나게 행동하면서 명예를 추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의 기쁨을 다하고 한창 때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중략) 당신은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남에게 뽐내며 이론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명예와 벼슬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 하고 있으니 어찌 형편없고 불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산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형제들의 삶을 옳지 못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형제들이 보기에 자산의 지혜와 예의는 자신의 감정과 본성을 억누르고 명예를 추구하느라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산은 자신의 분별로 형제들의 행복을 폄하한 것이다. 

열자가 9년간의 배움 끝에 다다른 것은 확실한 판단력이 아니라 무분별이었다. “천하의 이치는 언제나 옳은 게 없고 언제나 그른 게 없다.”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 안과 밖의 구별도 없어져버린 경지. 이것은 분별력의 상실이 아니라 고정된 가치 기준의 거부다. 큰 것과 작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남쪽의 유자가 회수를 건너 북쪽에 오면 유자가 아니라 “탱자”가 된다. 그러나 유자가 옳고 탱자가 나쁜 게 아니다. 천지의 기운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삶이든 그 자체로 완전하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산의 삶을 원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어도 선뜻 “나는 원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세상의 원칙을 내면화해서 그것을 자신의 분별로 삼는다. 그렇게 해야 타인의 인정을 받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의 분별이 있다면 자신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한때의 비난을 피하고 영예로운 일을 중시하느라 자기 정신과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인가? 

열자는 인간이 삶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가 목숨, 명예, 지위, 재물을 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 변하고, 사라진다. 나 자신도 이 덧없는 흐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 궁극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영원히 가지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니, 이 짧은 생을 살면서 하루라도 편할 날이 있겠는가? 내가 가진 가치척도를 내려놓고 사물의 질서를 따르면 자신에게 어떤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그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불행 역시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소유를 향해 삶을 갉아먹고 급격한 감정의 기복을 겪는 대신, 사물과 자신의 모든 변화를 겪고 지켜보면서도 동요되지 않는 마음으로 살기. 이것이 열자가 말하는 ‘지복至福을 누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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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포대흠신布袋欠伸:포대화상이 기지개를 펴다>


4. 불안의 시대, 열자가 보여준 길


“비록 공자의 도와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허정하고 담박하며 확 트인 마음으로 난세에 살면서 이익을 멀리하여 화가 몸에 미치지 않게 하고 그 마음은 궁박하지 않다. 그러니 『역경』의 "세상을 피하여 근심이 없다"는 경지가 이와 가깝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그 내용을 긍정한다.” (유종원, 「열자를 변호하는 글辨列子」)


유종원의 말대로 『열자』는 인의예지 따위를 무시하고 사는 “이단적” 쾌락주의자들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삶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열자의 주장은 그 시대가 얼마나 평안치 못한 시대였는지를 반증한다.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다독여야 할 정도로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지만 열자는 삶을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행복을 구성해야 한다. 행복에는 어떤 ‘외적 조건’도 필요치 않다. 자신이 처한 상태 그대로 자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누항陋巷에서라도 유쾌한 삶을 살 수 있다. 

열자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행복을 약속하는 자들이 “환상적으로” 만들어 낸 이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자가 되면, 지위를 얻으면, 존경을 받으면… 그러나 행복하고 싶다면 이런 거짓 약속에 속지 말라! 행복은 아무 조건 없이도,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어떻게? 분별을 버리고, 척도를 내려놓고, ‘미래’라는 환상에 현재를 걸지 않음으로써. 『열자』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 우리의 환상을 폭로한다. “전국민 행복 시대”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발명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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