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행에 젖어있는 빈민촌 아이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간직한 순수한 실존이며 민중의 형상이다. 빈민촌 아이들이 갖고 있는 쾌활함과 무례함, 동물적인 충동, 순수함과 폭력성은 민중의 특성이자 자연의 두 얼굴이다. 아이들의 야만적인 생명력은 순수와 폭력, 선과 악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보와 발전을 표방하는 로마에서 돈과 성을 좇아 움직이는 동안 점차 순수와 선은 사라지고 폭력과 악만이 확대재생산된다. -폭력적인 삶, 작품해설中-
톰마소 마을의 모습이 딱 자연의 두 얼굴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자연의 두 얼굴을 이성으로, 법으로 재단할 수 있는걸까요. 이건 생각해봐야할 문제인 것 같아요. 애초에 소탕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섬뜩했던건 이 빈민가가 이제는 사라졌다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빈민가에대한 순수와 선은 사라지고 폭력과 악만이 확대재생산되니까 빈민가는 점점 더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났겠지요. 그리고 자본주의의 파시즘은 우리의 욕망과 시선을 유도 해버려서 이제는 빈민가가 존재하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누가 대한민국에서 빈민가를 상상하나요. 하지만 자연의 두 얼굴이기에 이는 어딘가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겠죠. 이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많은 나의 시선들이(자유롭다고 생각한) 조작되었을까. 그리고 보지 못한, 아니 볼 수 없는 것들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어요. 뉴스를 보면 웬만한 범죄자들은 거의 다 잡히잖아요. 근데 완벽한 범죄는 완벽해서 범죄인줄도 모를텐데, 그런 범죄들이 상상이상으로 많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건 알 수가 없잖아요. 뉴스에서는 범인 잡은 이야기만 하니까 범인은 다 잡히는줄 알게되니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파시즘에 의해 거의가, 아니 모두일지 모르겠는데 유도된 것, 조작된 것일겁니다. 그렇다면 이 파시즘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완전 착 달라붙어있어서 보이지도 않는 이 파시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파시즘에 열심히 대항한 사람이 파졸리니라는 채운샘의 말씀이 아주 쬐끔 쪼금은 쪼금 '느낌은' 알거같아요.
파졸리니는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반파시스트임을 보여줬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