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세미나에서는 고대원자론을 3장 <루크레티우스>편까지 다 읽고, 앞의 내용까지 포괄해서 정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 관한 맑스의 논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에피쿠로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수능공부하던 때, '윤리'과목에서였습니다. 수능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를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와 비교하며, 아파테이아는 세상의 일에 초탈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아타락시아는 '올바른' 쾌락의 영원한 지속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만 배웠습니다. 에피쿠로스 전에 배웠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에피쿠로스토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언젠가 따로 공부해야지하며 그냥 외우고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를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연히 정리된 내용을 암기할 때 '아.. 별로네, 이 철학은 잘못되었네'하고 쉽게 결론지었던 생각들이 싹 사라졌죠. 에피쿠로스의 철학는 어려우면서도 깊이 있고 놀라웠습니다.
고대원자론에 나오는 세 명의 철학자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연학과 철학을 분리하지 않고 통섭적으로 학문을 했고, 그렇기에 자연이 어떠한 원리로 돌아가는지를 밝히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하는 질문의 답을 밝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등 다양한 철학자들이 세계의 구성방식과 원리에 대한 나름의 이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세계는 불에서부터 생겨난다, '정신'으로 파악된다 등 다소 추상적이었습니다. 한편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원자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들의 뭉침과 흩어짐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해나가는가, 더 나아가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포괄적인 답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 역시 원자들의 움직임들이 우주의 필연성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하면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등을 설명하지 못한 것이죠.
이러한 데모크리스의 철학에 하나의 개념을 더해서, 이를 전혀 다른 차원의 철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을 더하면서 원자의 개별성을 인정합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분리되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맑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어떠한 필연적 질서에서 고유한 개별성을 갖고 움직일 수 있는 원자론을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에서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커다란 질서 안에서 고통받는 개인(노동자)은 에피쿠로스의 철학의 틀로 보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시적인 사회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세계와 사회에 어떠한 질서와 원리가 있다고 할 때, 개인이 그것에 규정되고 정의내려지는 것이 수동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면 삶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한대로 그러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개별성'에 집중하고 그것대로 움직인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삶은 기예(art), 즉, '나는 지금 어떤 몸짓으로 살아가는가?'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니체가 말한 '주사위 놀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