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청명합니다. 산에 올라 보니 저 멀리까지 시야가 깨끗해서 깜짝 놀랐어요. 이 좋은 날들을 즐기고 계신지요? 그러기에 너무 바쁘신가요? ^^;;
일리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어느 일본 기자가 물었다죠. 당신은 10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어느 것이 모국어냐구요. 그는 자신에게 모국어는 따로 없다고 하면서, 아마 죽을 때 생각나는 언어는 라틴어일 것 같다고 했다죠. 라틴어는 현재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고문서에만 존재하는 언어죠. 일리치는 중세를 탐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물론 그는 과거 얘기나 하는 고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역사를 탐구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념들을 근본부터 다시 사유하기 위해서죠.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는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무기인 셈입니다. 물론 신의 말씀이 적힌 언어이기도 하지만요. radical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근본적, 급진적. 가장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사유하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이가 바로 이반 일리치입니다.
몇 주 전에 읽은 <반자본 발전 사전> 에서 가난과 빈곤이 구분됐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중세에 빈곤은 결핍을 느낀 사람 자신에 의해 결정되었고 빈곤한 자는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 규정된 자입니다. 사회나 국가가 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낙인찍고, 보호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이런 호들갑 속에서, '어, 내가 정말 가난한가?' '아, 난 가난하구나~'하고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상관없죠.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문명의 미개인이고 가난한 자입니다. 물론 실제로 비싸서 쓰지 않는 거지만 필요가 없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어떤 '수준'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을 들이밀면 없는 저는 그저 가난한 자일 뿐이죠. 그러니 사회는 물건을 생산하면서 가난도 같이 생산하는 셈입니다.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편의가 조직되고 폴더폰이 단종되면 저도 언젠가는 스마트폰의 세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가 거의 임박한 듯.
참 무섭습니다. 무엇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라니. 무엇을 가져야만 문명인이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니. 일리치는 이 획일성에 몸서리를 치는 것 같습니다. 성장, 발전 논리 속에 갇혀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가난할 겁니다. 퇴치해야 할 것으로서의 가난이 어느 수준 이상을 갖춤으로써 사라지는 것이라면,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가 제시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늘 허덕댈 것이기 때문이죠. 만약 가난을 다시 사유할 수 없다면 불만족과 그로 인한 괴로움은 영원히 지속될 겁니다. 그래서 자발적 가난이 가난한 자에게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무엇이 더는 필요없다고 말하는 가난. 이 이상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이 필요없다고 외치는 가난. 지금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가난. 지금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논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죠. 이보다 더 급진적일 수 있을까요? 와우~~
이제 이브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네요. 마지막까지 힘내서 가봅시다요! 그럼, 다음 주에 발랄한 모습으로 만나요~~^^
9/30 세미나 공지
1. 읽을 텍스트 :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2. 발제는 없습니다.
3. 공통과제 : 모두(자기 것 포함 7장 출력)
숙제방에 올려 주시와요~
4. 간식 : 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