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걸쳐 톨스토이와 함께 한 여정, 어떠셨는지요? 그는 우리가 결코 하지 못 할 엄청난 생각을 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었죠. 문득 우리를 엄습하는 허무함,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는 기쁨, 행복, 건강, 생명 등에 대한 생각은 그리 특출난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이런 생각들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스쳐지나가는 생각일 뿐이죠. 하지만 톨스토이를 비롯한 성인들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대해서 사유했습니다. 나는 병 들고 죽어 장차 썩어 없어질 것이다. 이것만이 삶의 진리죠.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원하지 않음, 무상함을 항상함으로 붙들고 싶어하면서 우리의 번뇌가 시작됩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고통스러운가를 사유하지 않죠.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는가? 왜 나는 병들고 아픈가? 왜 나의 젊음은 이렇게 스러져야 하는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이런 구체적 사건들 속에서 인간 존재의 조건 자체가 무상하다는 것,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사유하지 못하는 것을 톨스토이는 동물적 자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삶은 모순으로 가득찬 것이죠. 나처럼 열심히 산 사람이 왜 병에 걸리는가? 나처럼 그이에게 충실한 사람이 없는데 왜 그는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왜 나한테!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말하죠. 이성적 자아, 즉 생명을 깨달은 사람, 다시 말해 영원한 것은 없다, 삶 자체가 죽음을 향한 여정임을 아는 사람들은 저와 같은 사건들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적 자아를 억제할 수 있는 거죠. 쾌락, 즐거움, 기쁨, 좋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억제나 금욕은 무상함을 알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취하지 않는 능동적 실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과는 다르죠.
위대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웠던 사람들, 즉 능동적으로 자기 삶의 양식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것도 그런 것이구요. 오십에 모든 것을 누리고 가졌던 한 남자가 자기에게 닥쳐온 허무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 얻으낸 답은 생명이고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과 사랑은 인간 존재의 조건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었죠.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 싶다. 모두가 나만 사랑했으면 좋겠다. 이런 상태의 지속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릅니다만, 톨스토이의 행복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찾아옵니다. 행복은, 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자기애로부터 빠져나와 나의 행복은 타자의 행복과 함께 할 때 가능함을 알 때 성립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찾아낸 답을 실천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점이 위대하고 멋있는 거죠.
톨스토이의 자신을 대면하는 용기, 자기 안에 생긴 질문에 끝까지 집요하게 답을 구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가 얻어낸 답대로 산 점이 멋있다고 여겨진다면, 거꾸로 우리는 우리에게 물어야 할 겁니다. 나는 나의 질문에 얼마만큼 치열하게 답하고 있는가, 답을 구하는 어떤 여정 속에 있는가 하고 말이죠. 그것은 지난한 과정일 겁니다. 때때로 삶이 주는 달콤한 꿀에 그 질문을 잊기도 하겠죠. 아마 그러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어떤 질문이 나를, 내 삶을 뒤흔들고 있다면 한 번 끝까지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생이 다 걸리더라도 말이죠. 그럴 수 있다면 꽤 멋진 삶이 아닐까요?
절기란 참 놀랍습니다. 이제 여름은 다 지나간 듯 합니다. 벌써 낮의 느낌이 다르고 아침 저녁도 그렇게 선선할 수가 없어요. 벼가 익는 좋은 이 날들을 만끽하시고, 다음 주에 선들하게 뵈어요~ ^^
8/19 세미나 공지
1. 읽을 텍스트 : 마하트마 간디, <간디, 나의 교육철학> (문예출판사)
2. 발제 : 태람 (자기 것 포함 14장 출력)
3. 공통과제 : 발제자 빼고 모두(A4 한 페이지 분량), 꼭 숙제방에 올려주셈!!
(자기 것 포함 7장 출력, 영은조 8장 출력)
4. 간식 : 영숙 샘